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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 1919년 3월 당시 김제군 수유(현 금산)면 구월리 구봉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배세동(25세) 청년은 평소 나라를 빼앗긴 백성으로서 일제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있었다. 그해 3월 13일 전주시장에 갔다가 그곳에서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에 함께 참여하고 돌아온 그는 자기 고장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서 같은 리 어유동의 지도자 전도명(48세)을 찾아 의논하였다. 옳은 일이라면 언제나 팔을 걷어부치고 앞장서는 전도명은 이에 적극찬동 같은 마을에서 동지를 규합하니 전도근 고인옥 전부명 김성수 전천년 이완수 이병섭 등이앞을 다투어 나섰다. 배세동과 전도명은 이들 동지와 함께 3월 16일 어유동에서 밤을 새우며 모의를 거듭한바 3월 20일 음 2월 19일 원평장날 오후6시 일몰을 기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거사키로 결정하였다. 이에 동지들은 당일 장꾼들에게 배포해 줄 선언문과 태극기를 준비하였고 이병섭 등은 각지에 긴밀한 연락을 계속하였다. 드디어 약속시간 오후 6시가 되자 배세동 외 8명의 동지들은 구척의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달고서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치며 준비한 선언문과 태극기를 뿌리니 여기저기서 대기하고 있던 김대희 외 수백명의 장꾼들이 뛰어나와 원평장터는 삽시간에 시위군중의 만세함성으로 들끓었다. 그러나 비상시국이라서 장꾼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일제의 무장헌병과 경찰들에 의해 배세동과 동지들은 현장에서 검거되었고 장꾼들은 강제해산 당하였다.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배세동 외 8명의 독립투사들은 구속되어 모진 고문 끝에 6월에서 1년의 실형을 받았으며 출옥한 후에도 왜경의 감시와 사찰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배세동 투사는 1942년 전쟁의 와중에서 혈안이 되어있던 왜경에게 재검속되어 저항하다가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48세의 한창 나이에 목숨을 잃었으니 이 억울하고 분통한 마음 달랠 길이 없다. 외세의 간섭과 왕조의 학정으로 백성들의 원한이 극에 달하였던 계사 1893년 3월 1만여 동학농민들이 원평에 집결하여 당시 조정을 당혹케한 이곳 장터에서 또다시 동학농민의 후예들이 일제에 항거하여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으니 이 고장 출신 선열들의 단호한 구국정신에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동안 원평 만세운동의 정확한 자료와 증거를 찾기 위해 수년간 조사를 거듭하면서 가슴아팠던 것은 유족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괴로웠기에 자기조상의 자랑스러운 애국운동을 아예 알아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독립유공자의 후손인것조차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지성사회의 무관심과 유족들의 자포자기 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차원의 포상은 커녕 추모의 빗돌 하나 없었으니 이 고장에서 나고 자란 후인으로서 송구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제 늦게나마 가신 임들의 그 생생한 투쟁사료와 재판기록 등을 찾고보니 우리들의 할 일은 이제부터라고 다짐하였다. 모악향토문화연구회에서는 임들의 그 숭고한 애국충혼을 길이 받들어 선양키 위해 원평거사 70주년이 되는 금년 3월 20일을 맞이하여 전회원이 추진위원이 되어 앞장서고 김제군수의 지원과 지역주민들의 뜨거운 성금으로 그때의 거사장소였던 이곳 원평장터 유목정에 오늘의 이 기념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