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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환책이었다. 이때 그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이를 송공하려하였으나 선생의 강력한 거절로 뜻이르기를 포기터니 거관후에야 입비하고 더욱 그 덕을 칭송하였다. ?고산현 부임시는 이미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날때라 조야가 모두 전긍하였으나 선생은 교화와 회유의 은정으로써 민심을 선도하고 생업을 안정케하였으니 이는 조저에서 다스리기 어려운 지방에 특히 선생을 선정하여 맡기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게되자 그 허물이 어찌 매국7적에게만 있느냐며 자문하고 스스로 하늘을 불수없는 대죄인이며 부모를 대할수 없는 대불효를 지었다는 자죄문을 짓고 자신이 불충불효라는 자책감으로 스스로 죄인이라하여 단식에 들어갔으며 또한 왜정이 한국인 중신들을 회유키 위하여 주는 돈을 뿌리지면서 추한 돈을 가지고 감히 불한인을 치욕하느냐며 이를 꾸짓는 토왜문으로 적도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임종에 임박하여는 고대한동포문을 지어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으면 반드시 살아날길이 있을것이요 반대로 마음과 힘이 분산되면 죽는 길이 있을뿐이라 하여 민족의 일치단결을 읍소하면서 부모에게서 온전하게 받은 이 몸이 왜적의 칼을 받으며 또한 스스로도 살상할수있으랴하면서 조용히 누워 절식한지 27일만인 경술년 11월 27일에 서거하니 향년70이다. 선생의 이 입절의사는 ?인에게 ?효지심을 격앙시킨 백세청풍이요 침략자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었다. 선생의 유지도칙은 이후 온 민족의 독립의지로 승계되어 마침내 왜적을 물리치고 조국광복을 이룩하였으며 이 고을 유림들의 정성으로 여기에 서강사를 세워 송은공과 더불어 춘추로 제향을 받들고 1962년 3월에는 정부로 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으니 선생의 위업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나리라 이제 군민의 뜻을 모아 비를 세우고 사적을 약술하니 선생의 그 고청하신 정신이 어찌 졸문으로 현양되리오마는 다만 유적지에 표성하여 후인의 관감지자로 삼고자 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