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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송재 장현식(松齋 張鉉植) 선생 약전 선생은 인동 장씨 시조 금용공의 30대 손이요. 여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인 송은 안세공의 19대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서 진안 현감을 지내고 이곳 서도리를 세거지로 정한 중조 진안 기건공의 17대손이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의분이 받쳐 단식 절사하신 일유재 장태수 선생의 종증손이다. 사종원 부경으로 고종을 최측근에서 모셨던 일유재 선생은 장성하는 송재 선생에게 "하늘을 우러러보아, 땅을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훈도하셨다고 한다. 당시 15세이던 송재 선생은 자신을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신 종증조부께서 단식 순국하시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항일독립의 유지를 이어 받들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송재 선생이 이곳 서도리 입구에 송은공과 일유재 선생을 봉제사하기 위해 서강사를 지은 것도 조상의 충의정신을 명심물망하고 자신의 항일 독립의지를 다짐하기 위한 것이었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에서 거족적으로 전개되고 있을때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그해 4월 지하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이 결성되었다. 그 때 23세의 송재 선생은 대담하게도 3천원이라는 거금을 대동단에 내놓았다. 이 중 1천5백원은 대동단 운영에 쓰였고 나머지 1천5백원은 중국 상해로 보내져 신규식 선생이 주관한 '독립'이라는 출판물 발행에 쓰였다. 선생은 계속 '대동신문'의 재정을 담당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져 선생은 일경에 체포됐고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대동단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키려 계획했으나 중국으로 가는 도중 의친왕이 일경에 붙잡혀 수포로 돌아갔다. 그후 일제의 검거 선풍이 불어 다수 단원이 투옥됐고 결국 이 비밀결사는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대동단은 항일독립투쟁 역사상 특기해야할 전국적인 규모의 최대 조직이었다. 대동단의거로 옥고를 치른 송재 선생은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선생 등과 가까이 교유하면서 구국과 독립을 위해서는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민족사학을 일으켜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햇다. 선생은 중앙고보(중앙고등학교 전신) 교사 증개축과 보성전문(고려대학교 전신) 본관 도서관 신축에 인촌 버금가는 기금을 헌납했다. 또한 1920년 전국 각지 애국지사들과 독지가들의 발기로 '조선민족의 표현기관'으로서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도 최상위로 설립자금을 기부, 민족언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창간 이후 17년간 동아일보 감사로 재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