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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우정 김선생 투수 순절 추모비 오호라 여기가 춘우정 김선생이 투수순절하신 신창진 나루의 바로 건너편 유지이구려. 춘평추우 60여년간에 저 나루를 지날때 뜻있는 사람으로서 몇번이나 목이 에었으며 금후 영원한 세월동안 적시창파에 섞인 눈물이 얼마나 흘러갔겠는지 무릇 호생악사는 사람의 상정이지만 무거운 절의를 위해 생명을 가볍게 버리는 일은 지극히 어려울 뿐 아니라 여기에는 숭고한 가치가 있는것이다. 우리 단군성조의 건국하신이래 반만년 동안 국가의 화변이 있을때마다 무수한 의열의 인물이 배출되었음은 모두 민족의 맥박속에 유전한 정기의 발로이며 또는 계?개래한 공로의 표현이 되기때문이다. 선생의 휘는 영상, 자는 승여 호는 춘우정이요 본관은 도강이다. 충민공 회련의 16세손으로 유업세습한 가정에서 단기 4169년 헌종 2년 병신3월 18일에 정읍군 정우면 산북만제에서 출생하였다. 원래 품성이 강개하시고 학문의 조예가 깊었으며 여망이 높으셨다. 일찌기 소문양 인산선생께 수학하셨고 당시 명유 기문절후 사송 문충연제 전간재 제선생과 종유하셨으며 을사늑약후 최면암선생과 함께 의거를 도모하셨으나 뜻을 이루시지 못하셨다. 단기 4243년 순종 4년 경술늑병을 당한후 10월에 왜수의 보낸 소위 은사금을 거절할뿐아니라 보낸 서자를 찢어버리셨다. 그후 불경이란 죄로 동곡 헌병대에 구속되셨으나 조금도 굴치않으시고 단식으로 저항하시다가 그 뒤 군산수옥으로 이송도중 만경강 신창진 나룻배에서 의대찬을 써놓으셨다 그 뜻을 풀이한다면 옛날 굴원의 정충은 루나수에 던져 일기로 삼았는데 이제 나는 양구의 운을 당했으니 사진으로 좇아간다 술 3배로 어복의 충혼을 위로하고 노중연의 답해를 닮아 영원히 물가에 오르내리고저 라는 글을 남기고 즉시 창파에 몸을 던지셨다. 그러나 호송하던 왜졸들에게 구출되어 당일밤 군산수옥에서 단식하신지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