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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일신영달의 전도가 보장되어 있었건만 공은 유독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의협심이 강한지라 여기에 안주하지아니하고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고 계목하는일에 몰두하는 한편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던차에 한일사상이 농후하다는 이유로 1928년 9월 3학년때에 퇴학처분되었다. 공은 당년 12월 만주로 망명하여 돈화현에 있는 독립군에 가담 군자금조달과 무기의 확보에 전심전력하더니 1932년 에는 간도의 일본영사관을 습격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왜적에게 체포되었다. 일제는 1933년 12월 의사에게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징역 15년을 언도하였으니 이후 대전 마포 서대문 함흥등지 의 형무소를 전전하며 복무하다가 1944년 3월 12일 함흥감옥에서 38세를 일기로 장서하였다. 오호라! 하늘도 무심하도다. 조국광복의 그날을 불과 1년여 남겨둔채 옥중고혼되었으니 의사의 우국애정은 필시 한맺힌 원귀되어 구만리장천을 헤매었으리라. 연이나 의사의 영혼이 감응하여 을유해방으로 국권이 회복되니 1946년에는 수원고농명예졸업장이 수여되고 잇따라 임피향교 교지에는 의사의 항일행적이 수록되고 전북일보에는 의사의 항일투쟁사가 보도되고 군내 각기관및 단체의 장과 유지들이 나서서 의사의 공적을 기리고 그 애국정신을 귀감삼을것을 관계요로에 건의하더니 드디어 1986년 12월 16일에는 정부에서도 의사를 독립유공자로 확인하기에 이르러 헌법의 규정에따라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어호! 님은 비록 일찍 가시었을 망정 님의 공적은 조국독립의 청사에 찬연히 빛날것이요 님의 애국단심은 영세불멸의 민족혼으로 남으리로다. 입비시 현재 선형 영준 망제 영욱이며 영진 영곤 완녕등 3형제는 유종하고 무후인채 옥중순국하였기로 체달하니 사자는 종화이며 손은 성수 권수 이다. 1989년 보훈처로부터 묘비건립기금 일백만원이 영달되니 영진 영곤 완영등 3형제가 주동하고 종손 범석과 인우 일걸등이 진력하여 종중에서도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