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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송원 심재순선생 공적비 송원 선생(1898~1939)은 조국이 일제에 병합된 암울한 시대에 오롯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이다. 선생은 청송인이며 심제섭공과 풍천인 임선여사의 2남1녀중 장남으로 전북 옥구군 나포면 부곡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 3월 군산 영명학교에 입학 2학년 재학중 한강이남에서 맨 먼저 귈기한 1919년 3월 4일과 5일 교사, 학생중심의 제1차 3.1만세운동에 앞장서 시위하다가 군산경찰서 일경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끝에 석방되었으나 강제퇴학을 당한 뒤 일제에 대한 울분과 한을 품고 1920년 서울로 상경 대동인쇄소에 재직하면서도 면학에 힘써 부기학교를 수료하였다. 1925년 국권회복의 역량을 키우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동성인쇄소에 재직하면서 각종 도서와 출판물을 통하여 국제정세와 선진문명에 대한 식견을 넓히고 극일의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이상재선생이 이끄는 신간회에 가입하고 향리의 김병우, 노진술등과 함께 신간회를 중심으로 동지들은 규합하고 청년, 여성, 농민의 역량을 모아 조직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 일에 진력하였다. 1927년 삼례, 황등, 서수평야를 점거한 일인 이엽사 농장주의 가혹한 소작료 수탈로 피폐해진 소작농민들의 참상을 접하고 동향의 신현국, 심상악, 심상호, 심호택등과 소작농민들에게 비밀리에 연락하여 '농민조합'을 조직해 항거, 봉기하도록 유도하고 같은 해에 '친애하는 동향 여러분께 격함'이라는 격문을 동성인쇄소에서 대량인쇄 고향의 지인들과 소작농민들에게 발송, 봉기를 독려하여 이른바 '옥구농민항쟁' 유발에 기여하였으며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에 맞서 천부적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다.1930년 체포되어 1931년 9월 19일 전주 지방법원에서 출판법및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고 출감후에도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군산, 익산, 김제지역을 다니며 야학과 순회강연으로 민중계몽활동을 실시하여 자주독립의 의지를 북돋아 나가는데 심혈을 기울이다가 끝내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1939년 향년 41세에 영면하였다. 부인 최숙정여사는 어린 5남매를 키우며 온갖 고초를 겪는 가운데도 부군의 구국활동에 기꺼이 참여하며 내조에 정성을 다했다. 2005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독립유옺아로 추서하고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