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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학교 전교직원, 전교생, 구암병원 사무원, 신자들과 일반 시민까지 모두 참가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전모임의 결의와 준비로 3월 4일까지 거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으나, 돌연 3월 4일 새벽 군산경찰서의 일본인 무장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송정헌 등을 구인(拘引)하는 바람에 사전 발각되어 좌절될 뻔 하였다. 그러나, 김윤실 교사를 중심으로 격분한 학생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3월 4일에 잡혀간 교사들의 석방을 위한 시위가 첫 만세 시위 운동이었다.일본 경찰이 1차 학생시위를 진압하고, 주동자를 유치한 후, 방심하는 사이 3월 4일의 만세시위 진압이 자극제가 되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5일에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그 규모는 컸었다. 주로 학생들에 의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고, 체포를 면한 기독교 학교인 영명 남학교, 멜본딘 여학교 교사와 학생, 구암 예수병원 사무원, 구암교회 교인 등이 합세하면서, 백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500여 명으로 늘어나 성난 노도와 같이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