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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婢恭任지墓(의비공임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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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임은 연재선생의 몸종이었다. 송병선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자 그녀도 1906년 음력 1월 16일 칼로 목을 베어 순사하였다. 즉 그녀는 영동에서 송병준의죽음 소식을 듣고 그녀는 주인의 상식을 위하여 10여일 남짓 통곡으로 날을 보내다가 27세의나이로 자결하였다. 출처 : 카페 금산사랑(http://cafe.daum.net/kumsan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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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비(義婢) 공임(恭任) 때는 1905년 11월 우리 나라는 민족 역사상 수치를 맛보게 되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을사 조약의 체결이었습니다. 외부 대신 박재순을 비롯한 을사 오적들은 일본 공사 임권조와 더불어 오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 나라는 외교권을 상실했고 통감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이 무렵 군부 대신으로 있던 이근택은 그 죄상이 오적 중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친일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일찍이 젊었을 때는 역적 모의를 했다가 제주도로 귀양을 간 적도 있던 이근택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상륙한 난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잡으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근택은 끝내 구한국 군대에 투신해서 육군 참장을 지내게 되었고 을사조약 전후에는 군부 대신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은 이근택은 의기 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날 밤, 이근택의 집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만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보고 내 일생의 부귀 영화는 이제 떼어놓은 당상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떠들어대는 그의 얼굴에서는 부끄러운 기색이란 전연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 집의 부엌에서 찬을 만들고 있던 하녀가 그 말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칼로 도마를 내리치면서, "네가 그토록 흉악 무도한 줄을 내 미처 모르고 여러 해를 섬겼으니, 그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노라!"라 소리질렀습니다. 그 당시의 신분 질서로 볼 때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이와 같은 무례한(?) 행동에 너무도 어이가 없던 이근택의 부자는 잠시 후 정신을 차려 그녀를 잡으려 하자 그 계집종은 대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역적의 대문 앞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동리 사람들은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소위 상전이라는 자가 저토록 흉악해서 내가 나무랐더니, 나를 치려 합니다. 나를 구해 주시오." 이근택의 부자는 종년을 잡으려고 대문을 뛰쳐나왔다가 노도같은 동리 사람들을 보는 순간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고서는 허겁지겁 대문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조금 있다가 그 집안의 침모가 또한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오면서 역적놈의 종노릇은 하지 않겠노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소문이 서울 시내에 널리 퍼지자 역적 집안의 종으로서 집안을 뛰쳐나오는 의로운 계집종들이 많이 생겨났고 대사헌 송병선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자 그의 비복이었던 공임(恭任)이라는 사람 또한 그 상전을 따라 자살했는데 그 때 그의 나이 27살이었다고 합니다. 출처 : 블로그 을사순국충혈지사(http://blog.daum.net/abba_/13771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