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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미(海底)독립운동 약사 바래미 항일 독립운동은 바래미가 생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이 1919년 바래미 만회고택 명월루와 해관구택에서 제1차유림단사건(일명 파리장서사건)이 된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시작함으로써 비롯되었다. 1925년에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모금 운동이 발각된 제2차유림단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도 바래미에서 황소 쉰 마리 값을 모금, 심산 선생에게 건넨 사실이 발각되어 온 마을이 쑥밭이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더욱 심해진 왜경의 감시 속에서도 선조의 애국충정과 선비 정신을 이어받은 젊은 세대들이 1933년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하다 발각된 독서회 사건으로 또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러야 했고, 이러한 바래미 항일 독립운동은 학생층에까지 3대(三代)로 이어져 대구, 일본, 만주 등지에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당시 온 마을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창희(昌禧), 중욱(重旭) 등 많은 독립유공자들이 더 있는데도, 자료 미흡과 증거 유실로 인해 독립유공자 열네분에 그치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단일 부락으로는 많은 독립유공자를 내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빠져서는 안 될 바래미기에 이 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워 선대의 그 뜻을 기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