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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단결을 도모하고 일본 상품의 배척과 국산품 애용을 호소하며 물산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조선독립운동사건으로 체포되어 울진헌병대에서 14일간 유치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한편 일제의 온갖 회유가 있었으나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퇴거를 강력히 요구하며 독립투쟁정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목익선생은 6월의 금고형을 받고 부산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향교와 유학 그리고 조선독립운동을 통하여 목익선생은 이조 말엽 유학의 대가이며 조선독립운동의 거장인 의암 유인석장군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에 의암 유인석장군은 죽헌 이목익선생 자택을 방문하였고 그때에 죽헌이라는 호를 친필로 작명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죽헌 이목익선생 자택 사랑채 현관에 의암 유인석장군이 쓴 현판이 그대로 걸려있다. 이와 같은 두분의 친분관계에서 조선독립운동의 방향을 깊숙이 논의하였고 동지로써 그리고 철학과 사상의 공유자로써 끊임없는 조선독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또한 고종황제가 서거하자 상주된 마음으로 흰갓(백립)을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그 날까지 쓰셨으니 충절의 정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동생 화익선생은 형 목익선생과 같이 성품이 강개하고 지조의 정신이 강했으며, 형제간의 우애도 남달랐다. 아울러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찬탈당하자 국권회복운동이 절제절명의 과제라며 조선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쳤다. 화익선생은 1919년 3월 11일 울진군의 독립운동가 23명과 함께 유명한 울진군 매화 시가지에서 흥부 시가지 행진하는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4일, 조선독립만세운동의 기세가 울진 전역에서 일어날 징후가 보아자 불안을 느낀 울진군수 강성희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온정면으로 출장, 그곳 유지 다수를 모아놓고 조선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지 말것과 일제에 찬동하여야 한다는 훈시를 했다. 그리고나서 그들로부터 서약서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선생은 급히 온정면사무소에 당도하여 군수면전에서 "당신도 조선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조선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서야 하거늘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하며 크게 호통을 치고 서약서 반환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리고는 서약서를 강제로 받은 이유를 묻고 군수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그 자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속 고창하였다. 이와 더불어 오래전부터 실행하려고 했던 온정 헌병주재소에 돌입하여 창문과 기물을 파괴하면서 일본제국주의 시설물을 철거하라고 항거한 후 다시 연속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니 선생의 독립운동정신과 기세는 더 한층 높아졌다. 또한 일본 헌병대에 즉시 체포되어 군수와 함께 평해 헌변분소로 갈 때에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당도해서도 헌병보조원의 제지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양손을 높이 치켜 들고 경내를 돌면서 조선독립만세를 계속 고창하였다. 이러한 조선독립만세운동 사건으로 체포되어 평해 헌병분소에서 7일, 울진헌병대에서 6일간 유치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하지만 부산교도로 이송되는 도중에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끝까지 항쟁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