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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겨레는 평화를 사랑하고 의리를 숭상하며 염치를 아는 문화민족이요 울진은 정의를 쫒아 폭력에 저항하며 희생을 감수한 충절의 고장이다. 이곳 왜구의 침탈을 분개해 투혼을 불태운 많은 애국지사중에 살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의 은전을 입은 애국지사가 있었으니 연우 김병두선생이 그이로 서기 1897년 11월 6일 울진군 기성면 정명리에서 김해김 창국옹과 밀양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수로왕의 67세손이다. 선생은 강직한 품성과 민활한 자질로 나이 열둘에 애국지사 국오 황만영선생이 세운 대흥학교에 입학 그에서 지펴진 애국애족의 불씨가 열세살에 일헌병대 게시판에 고시된 경술국치의 공고문을 파기하는 소년항일투사로 성장케 하였다. 선생은 1916년 서울배재고등보통학교에 유학, 1919년 졸업 직후 기미 3월 1일 재학생과 함께 남산오포 탑골공원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동참 의분을 뿜었으나 세불리하여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 모금의 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고향에서 임정발행 독립신문을 배포하며 군자금을 종용하다가 왜경에 체포되니 때는 1920년 11월 이었다. 2년형을 받은 선생은 대구옥중에서 안재홍 이달 김성국등 60여 동지와 사귀며 그때 몰래 불렀던 애국시 독립군가 찬별시를 출옥 즉시 기록하여 지하에 숨겼다가 광복을 맞아 공개한 집념의 장부였다. 선생은 출옥 다음해에 삼척상장면에서 일본어 교육이라는 명목의 개량서당을 열어 사서의 중용을 강의하며 민족정신을 취입하다가 삼척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뒤 10년은 숱한 핍박과 회유에도 굽히지 않고 한의학에 전념하며 정명교회 청년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다가 드디어 왜경의 강권에 의한 타의로 도일, 경도에서 강원동지회를 구성하여 총무로서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41년 부친상으로 귀국이 허용되어 돌아왔으나 곧 이어 노무자로 징발되어 군내의 서면광산에 복역하다가 광복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