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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겠다는 일념으로 1908년 2월 부인 양씨(梁氏)와 아들 봉내(奉乃)를 가정에 남겨둔 채 의병장 심남일(沈南一) 막하로 합류하여 3월 7일의 강진 오치동 싸움을 시작으로 4월 15일에는 장흥 곽암 6월 19일의 함평장담원 6월 25일에는 능주 노구두와 7월 30일의 영암 사촌싸움을 거쳐 같은 해 8월 1일 나주반○에서 왜병 40명과 격돌하여 그 중 과반수를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하니 향년 54세였다. 그때 막하의 유능한 부장을 잃은 심장군은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일기에 기록하기를 우리 장수 조기보도 전사하였다. 아! 그는 죽을 자리를 얻어 순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들은 독립운동사에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 받았거니와 돌이켜보매 오늘의 우리가 있음이 어찌 이런 열사들의 희생의 은덕이 아니리오. 가슴 미어지는 감격과 슬픔을 가눌 길이 없도다. 공께서 순절한지 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향의 후진들은 추모하는 마음이야 간절하였지만 어지럽고 어려운 세태로 말미암아 고귀한 희생을 기리는 표석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뜻과 힘을 모은 다음 나주시장의 찬동과 후원을 얻어 여기에 이 빗돌을 세우게 되니 이것이 어찌 열사의 죽음에 대한 만 분의 일에라도 해당하는 보답에 되리요마는 만감이 교차하는 감회를 누를 길이 없도다. 2008년 8월 일 리명한 글을 짓고 리규형 글씨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