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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우리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끊기고 겨레의 앞길이 암담할 때에 갖은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의분투한 이산 윤승현 의사는 일찌기 파평윤씨 소정공 곤의 19대손 부 종혁, 모 이씨의 자로 1910년 10월 1일 이 고장 나주군 남평면 남석리에서 태어났다. 의사는 일찌기 광주고보에 진학 당시 한반도에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선 3.1독립운동으로 인하여 구국의 신념이 불타오르게 되셨다. 1928년 9월 4학년 재학 때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통분하여 동맹휴학을 주동 항일행동을 이대기와 전개하였으며 1929년 역사적인 광주학생 항일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퇴학을 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피신 중에도 구국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여 1931년 2월 동지들을 규합 농민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농민조합을 이대기와 함께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셨다. 1932년에는 전라남도의 성진회및 17개 항일단체를 통합 전남노농협회를 결성 책임 주도하였으며 활동기관지인 전남노동자신문 학생뉴스및 3.1운동 격문 등을 발간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과 잔학상을 만천하에 폭로함으로써 학생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활을 이대기와 함께하였다. 의사는 일제의 탄압이 날로 극심하자 지하운동단체로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전국평의회 및 신간회 등과 연계로 광복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자 항소하여 1935년 1월 28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의 판결로 옥고를 치르셨으며 출옥 후에도 계속 동지들과 경기도 청평에서 숯을 굽는 한편 신탄잡지를 발간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셨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아 건국에 힘쓰다가 6.25동란으로 귀향 중 시국이 혼란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민심의 안정을 호소하시다가 불행하게도 혈육 한 점 없이 향년 41세로 희생되셨다. 의사는 가셨지만 위대한 그의 가르침인 애국정신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조국광복에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