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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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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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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옥중에서 혹독한 고문에도 결사항쟁하여 끝내 식음을 끊고 순국하니 떄는 1930년 6월 2일 나이 겨우 22세였다. 의사는 아명이 규만이요 족보명은 상진이니 고흥부원군 영밀공 휘 청신과 충정공 휘 세의 후예로 죽계공 휘 춘영은 8향조요 이곳 주박공 휘 경원은 10대조가 되며 아버님 휘 세선 어머니 이천서씨의 장남으로 1909년 9월 15일 아신면 남산리 흥용에서 출생했다. 천성이 강직하여 학생운동의 중추가 되어 투쟁하다가 4학년때 순국영령이 되니 남산공동묘지에 수장되는날 사우는 명인하고 일경이 비탄에 젖었다. 이후 일제의 박해는 유족은 이산되고 의성의 메아리도 끊긴지 반세기 1982년 아우 김엄의 주선으로 건국공로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을뿐 포상에 따른 연금조차 수령할 자손이 없으니 가슴아픈일이다. 다행히 이번 국가에서 선열의 묘역정화를 위해 약간의 보조금이 지급됨을 계기로 각계 유지및 종중이 힘을 모아 의사의 무덤을 이곳 주진선영하에 이장하고 의적을 담아 표석을 세우면서 나에게 비문을 청함은 내가 임시정부에 몸담아 독립운동을 한 전력이 있고 또 운곡서원에 제임을 맡아 이곳 유림과 교분이 깊어서라. 이에 독립운동사 광주학생운동사및 국가보훈처의 공적조서를 자료로 의사의 순국전말을 약술하고 이어 명을 하여 만인으로 우러러 감발케한다. 나라위해 목숨바친 의로운넋 예있으니 선열공덕 힘입어서 조국광복 가져오니 일제통치 항거하여 만세운동 주도하다 국가에선 포상하고 유지들은 묘비세워 옥중에서 식음끊고 항사응적 순국하니 명복빌고 의적들춰 애국혼을 일깨우니 충혼의백 이아닌가 왜경헌도 떨었으리 천백세에 지나는손 머리숙여 기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