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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서울청년회·조선공산당·신간회 등의 단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권태석은 1919년 4월 조선민족대동단에 참여하여 자금조달과 각종 선전문건의 인쇄 및 배포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최익환(崔益煥)과 전협(全協)은 서울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는 '대동단' 조직을 계획하고, 4월에 김가진을 대동단 총재로 추대하였다. 한편 이들은 권태석에게 대동단의 설립 취지와 목적을 설명하고 자금 제공의 도움을 청했다. 권태석은 적극 찬동하고 인쇄기·용지 등 구입비와 기타 잡비로 여러 차례에 걸쳐 600원을 기부하였다. 이들은 5월 10일경부터 20일까지 밤중에 '선언서(宣言書)'·'기관방략'·'진정서'·'포고' 등의 문건을 제작 인쇄하였고, 이를 반포할 목적에서 별도로 '등교 학생 제군'·'경고간망청담제씨(警告看望淸談諸氏)'·'일본 국민에게 告함' 등의 포고문을 준비하였다. 권태석은 최익한과 함께 종로의 양제은(楊濟殷) 집에서 이들 포고문을 인쇄하고, 반포하려다가 5월 23일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권태석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1919년 제령 제7호·출판법·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6월 12일 출감하였다. 출감 후에도 권태석은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1921년 10월 4일, 금릉청년회(金陵靑年會) 임시총회에서 '청년의 의무'라는 제목으로 시국 강연을 하였다. 1924년 10월,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 결성에 가담하였으며 1926년 7월에는 조선민흥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조선민흥회는 서울청년회의 사상단체인 '전진회(前進會)'와 '조선물산장려회'의 결합으로 조직되었다. 창립준비위원을 선출하기 위한 발기인 심사위원으로 권태석·명제세(明濟世)·김정기(金正琪) 등이 선임되었다. 이 심사위원회에서 29명의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이 선출되었고, 권태석은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에 모두 선임되었다. 1926년 제2차 탄압사건으로 크게 약화된 조선공산당은 조선민흥회를 신간회(新幹會)에 흡수하게 하였다. 조선민흥회는 신간회와의 합동을 위해 권태석을 포함하여 김항규(金恒圭)·명제세·송내호·김홍진 등을 대표로 선정했다. 이들은 1927년 2월 11일 발기인대회에서 신간회 대표인 권동진(權東鎭)·홍명희(洪命熹)·신석우(申錫雨) 등과 만나 조선민흥회측은 회원 전원이 무조건 신간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하였고, 신간회측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권태석은 신간회 서무부장 및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27년 말 만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장작림(張作霖)이 한인들의 중국 귀화를 강요하고 박해하자 신간회를 비롯한 각 사회단체 인사들이 모여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창립하였다. 12월 25일 재만동포옹호동맹은 위원회를 개최하고 중국의 『동변신보(東邊新報)』가 '조선에 있는 중국인의 신변에 관한 호외'를 발행하여 허위기사를 보도함으로써 중국인의 배한 감정을 선동한 데 대하여 토의하고, 인천영사관과 인천화교총회에 권태석을 특파원으로 파견하여 진상을 파악하였다. 한편, 권태석은 1926년 10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2월 중앙위원회 조직부원이 되었으며, 1927년 11월 중순경까지 당원들과 수십 회의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당의 재건책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12월 서울 춘경원(春景園)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 출석하여 운동방침에 관한 테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1928년 1월 『조선일보』에 '조선 사회운동 개관'을 게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조선공산당의 당원으로 활동하던 권태석은 1928년 10월경 체포되었다. 1929년 4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6월 10일 출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