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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장내리 동학 취회지 이곳에는 1893년 3월 동학교인들이 전국에서 모여 쌓은 돌성의 자취가 있다. 1893년(고종 30년) 3월 11일(음력)부터 4월 2일까지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깃발 아래 최소한 2만 3천 여명의 동학교도인들이 이곳에 모였다. 지금은 남쪽 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지만, 땅밑에 단단히 박힌 기초석은 19세기말 겨레를 위한 농민들의 불같은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서양 제국주의 국가와 일본이 나라를 넘보고 있었고, 오랜 사회체제가 무너지는 가운데 많은 농민들이 부패한 정치와 불평등한 사회제도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새로운 민족종교 동학에 들어간 사람들은 더욱 심한 박해를 당하였다. 동학교단은 1892년 11월의 삼례집회와 1893년 2월의 서울 복합상소에 이어 이해 3월 대도소가 있는 보은 장안마을에서 취회할 것을 결정하였고, "구름과 안개가 메워지듯이" 매일 각처에서 몰려와 며칠만에 수만명에 달했다. 같은 시기에 전라도 금구 원평에도 교인들이 집결하여 왕조에 강력히 항의 시위하였다. 동학교인들은 자갈을 모아서 산 아래 평지에 길이가 백걸음 쯤 되는 성을 만들었고 긴 장대에 깃발을 달아 돌성과 북산,남산에 꽂아 놓고 낮에는 냇가에 모였다가 밤이 되면 부근 마을에 흩어져서 잠을 잤다. 대도소와 돌성을 오가는 교인들 모습이 엄숙하고 질서가 정연하였으며, 돌성 안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웠다. 이곳에 모여든 교도들은 왕조정부의 회유와 군대의 압력을 받은 끝에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9세기말 사회 개혁과 외세 배척이라는 시대 과제의 해결을 위해 정면에서 사회 개혁과 각성을 촉구한 농민들의 의지와 간절한 바램은 지금도 돌성의 흔적이 되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