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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춘추민속관의 별채가 독립유공자 범재 김규흥 선생의 생가이다. 김규흥 선생은 1919년 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대 초 북경에서 흥화실업은행을 세우며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1908년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임시정부에 참가하였으며, 한국 독립을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던 김규식을 지원하고자 파리로 파견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김규식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문제를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기 위해 힘을 쏟았으나, 열강의 외면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파리강화회의 이후 중국에 돌아온 그는 북경을 활동 무대로 삼아 박용만 등과 함께 무장투쟁노선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무장투쟁방략을 추진한 군사통일회의를 주도하던 박용만 등은 대조선국민군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이를 위해서는 자금의 확보가 필요한 일이었다. 김규흥은 그와같은 무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1921년 박용만과 함께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하였다. 흥화실업은행은 겉으로는 금융기관을 표방하였으나, 실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이들은 주식금 모집을 위장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모집된 자금으로 이들은 북경과 만주지역에 토지를 구입하는 한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을 불러모아 경작케 하면서 농한기에는 훈련을 실시하여 점차 각 군사단체를 통일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 대규모의 주식금 모집 계획이 뜻과 같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한인사회의 건설 및 군사양성의 계획을 달성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