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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김지수, 최남석, 청산면 백운리, 박재호, 안병하, 고한주, 박동의, 신업이, 청산면 지전리 손일만, 안대봉, 청산면 인정리 김홍 등 각 마을 대표들과 협의 4월 2일 청산 장날을 기하여 청산만리 제방천과 시장에서 집결하여 만세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4월 2일 1시부터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에는 청산면, 보은군 마로면, 영동군 용산면 면민들과 학생들이 가세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시위를 벌리니 인원이 수천명에 이르고 밤중까지 연속 되다가 새벽 1시경에 해산되었다. 선생은 이때 만세운동의 선봉에서 "죽더라도 내가 먼저 죽을터이니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선창하였다. 일부 의혈청장년은 일본헌병분소를 습격하였고, 일경과 헌병대 에서는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니 5명이 사살되고 5~60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필사항쟁을 각오한 만세시위운동은 4월 2일부터 시작하여 4월 4일까지 연 3일 연속되었으니 청산면민들의 우국충정의 장렬한 기개는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며 만대 후손들에게까지 귀감이 되리라! 영동군에 주재하고 있던 헌병중대의 병력지원과 옥천경찰서 지원을 받아 독립만세 시위가 강제 진압되자 일본헌병대와 경찰에서는 일제 검거에 나서는 동시에 독립만세 시위가담자들에 대한 천인공노할 고문을 가하여 김철수 열사가 순국하셨으며 여타지사들도 고문의 여독으로사망 또는 발인되어 수명을 단축시켰으니 그 처참했던 참상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으랴! 선생 또한 일본헌병대에 주동자로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다 당했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의 옥고를 치르셨다. 정부에서는 그 공을 기리어 1993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니 거사후 74년만의 영예이다. 청산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셨던 독립지사 대부분이 조국 광복을 보시지 못하고 타계하셨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다행이도 선생께서는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보셨고 청산면민들의 축하를 받으며 국가 발전과 민족의 안위와 조국통일을 염원하시더니 1949년 7월 17일 당년 73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취 광산 김경선 녀로 1920년 12월 9일생이고 생 1남 2녀로 남 익근 녀 서 안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