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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수 의병장은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일제의 한민족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간섭이 날로 심화되어 국운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임대수는 쇠퇴하여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충남 일대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려 19개군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대한제국군마저 일제의 책동에 의해 해산되기에 이르자 재거의하였다. 그는 5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은진(恩津) 일본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여 총기·탄약 및 서류 등을 탈취하였으며 구금 중인 애국지사들을 구출하였다. 그 이후 1907년 8월부터 1908년 2월까지 공주(公州)·천안(天安)을 비롯하여, 청양(靑陽)·당진(唐津)·보령(保寧) 등 충남 일대에서 활약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1911년 6월 공주에서 적과 교전하던 중 동지 6명과 함께 전사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