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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울분을 억누르면서 독립선언서 한 장을 휴대하여 귀교하였다. 윤지사는 동지 학생들과 중지를 모아 거사를 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독립선언서 인쇄용지 5천매를 자비로 구입 독립선언문을 동지들과 밤을 새워 등사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4월 1일 공주 장날 오후 2시를 기하여 윤지사가 학교종을 타종하는 것을 신호로 역사적인 공주장터 독립만세운동이 점화되었다. 윤지사는 당시 19세 학생의 신분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당당히 맞서 민족자존의 정의를 주장하여 시위 주동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언도를 받고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했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에 대한 사명감은 더욱 뜨겁게 불타 연기와 공주를 내왕하면서 8.15 해방시까지 지하운동을 계속하였다. 조국을 찾은 윤지사는 고난의 질곡으로부터 다시 찾은 나라를 재건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직접 참여 서면 면장을 역임하고 충남도 고문 면 의회의원.의장 등 지방 행정에 참여하고 농촌 계몽운동 국민교육과 문맹퇴치 운동 등 사회운동에 헌신 봉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투사적 독립운동가이면서 어려운 이웃에 대한 정을 가지고 인보상조의 덕을 쌓은 이면에는 부인 방영례 권사의 숨은 내조의 공이 컸다. 방여사는 일찍이 평양 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권사로 시무하면서 깊은 신앙심과 재색을 겸비한 부덕으로 나라의 위기와 평시의 내조자 역할을 훌륭히 해냈을 뿐 아니라 국가와 가문을 위하여 임종시까지 새벽기도를 한번도 결하지 않은 독실한 신앙심은 자녀 훈육에 깊은 영향을 미침으로써 7남매 모두 사회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봉사하니 장자 종구는 청주대학교를 졸업하고 평통위원 국도정 홍보위원 계훈학원 이사 등을 역임하고 자부 서정애는 청주사범학교를 졸업 교단에서 41년간 봉직하면서 독립운동가 윤씨 가문의 긍지를 가지고 2세 교육에 몸바쳐 고감으로 퇴임하여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는 등 전가족이 맡은 직분에서 수범적 책임을 다함은 양친의 훌륭한 정신과 훈육에 감화되었음이리라. 인간 윤봉균의 생애는 짧고 유한하나 애국의 지도자 윤봉균 지사는 크고 영원하다. 조국의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