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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碑文) 세칭 홍공을 묵제열사라 호칭함은 그의 천성이 강의해서 절의를 지킨 까닭이니 모든 가난을 극복하여 초지일관하고 위태롭고 어려운 자리에 처해서는 진퇴를 적당히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적과 대치할때는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은 것은 실로 우구충정의 열렬함에 기인한 것이리라. 공의 이름은 일섭이요 자는 찬명 초호는 치석 다음에 호를 묵재라 하다. 고려 개국 공신 태사 홍은열이 시조인데 여말에 정계가 혼란하여 공의 십육대조 원종공신 홍빈이 이조에 들면서 예산에 은거하야 망복의를 지키고 그의 증손 직장 홍순손이 비로소 연기로 이사하여 자손들이 대를 계승해서 호우의 승족이 되었다. 아버지는 병규요 어머니는 보성 오삼석의 딸이니 고종 무인(戊寅) 섣달 오일에 연북 봉촌(고복리 산양동)에서 공을 출산하였다. 청빈한 선비집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준수하고 강직하고 슬기로워서 사람들이 큰 그릇이되리라 하다. 그러나 나이 겨우 아홉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환거 부친이 손수 정구 지역을 맡으면서도 아들 교육에는 열성을 다하더니 공이 십삼세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니 아 기구한 운명의 시련이 이다지도 참혹할까. 공은 가정교육이 깊어 입신양명의 효도를 마음으로 맹세하고 있었으나 나이 벌써 열다섯인데 진학길이 없는지라. 고종 임진년에 가사를 형에게 일임하고 천애고아로서 떨어진 못 헤어진 신 초라한 모습으로 남으로 북으로 돌아다니며 탁신수학할만한 서당을 찾아 헤매기 벌써 일년이 넘었다.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심인가. 전북 고산에서 당세거유인 고진병 선생의 은고로 그 서당에서 침식하고 학습하니 인고 내핍하는 의지와 천재적 소질은 몇해 안가서 문예가 성취하고 문필이 훌륭하였다. 고종 을미년에 잠깐 고향에 돌아와 강릉 김진근의 딸과 결혼한 뒤 밤을 낮에 이어 열심히 과거공부를 하니 경전을 통달하야 문장이 섬부하였다. 고종 병오년에 궁내부 시험에 합격하야 장례원 장악과 주사에 임관된 뒤 각 궁기사관을 역임하고 익년 정미년에 시종원 주사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후에 역신 배의 작간으로 국사가 날로 그릇되고 세상이 어지럽더니 급기야 경술국치를 당하매 통분이 날로 심하여 1913년 가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을 돌아오니 그때의 아픔과 원통함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서당을 세워서 어린이와 청년들을 교육하야 장래의 묘맥을 배양하고 혹은 산수를 찾아 소요하며 혹은 친구를 맞어 술잔을 나누면서 스스로 나라잃은 슬픔을 달래고 매양 남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경술년 욕됨은 우리나라 천고에 없는 치욕이지만 반드시 회홍할 날이 올것이라 하더니 기미운동이 시작되자 전 군민이 공을 영수로 추대하매 공은 42세의 열혈용기로 동지를 규함하여(맹의섭 김재형 이은식 박한기 등) 비밀히 서로 호응하여 공주 청주 천안 등 지역에 독립선언문과 항일격문을 밤으로 살포하고 봉화대를 지정하야 서로간의 연락을 도모하고 삼월 삼십일 조치원 장날을 기하야 공의 선봉지휘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여 대거시위하니 수천군중이 좌호우웅하야 만세를 제창하니 그 소리천지를 진동하게 되매 왜헌병이 말을 달려 혈안이 되어 제지했지만 공은 그자들이 휘두르는 칼을 무릅쓰고 대적하니 적은 끝내 위협 총을 발포함에 이르자 적에 사로 잡힌자가 백여명이었다. 고문으로 문책을 당하자 두 번 다시 않겠다고 서약한자는 그 자리에서 모두 석방하였으나 오직 공은 태연자약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잃었고 너희들은 우리나라를 강도질한 것이니 도적노을 잡고 잃은 것을 찾자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여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욕설하니 끝내는 공주감옥으로 피수된지라 마침 지산 김복한 선생과 같이 한방에 있게 되어 간담을 서로 비치고 울분을 서로 위로하며 때로는 충의를 강마하면서 이년의 옥고를 치루고 집에 돌아오니 옛집은 거의 쓰러지게 되고 빈부억에는 먹을 것도 없었다. 다행히 친구와 종친의 부조로 다시 서당을 짖고 옛날과 같이 문도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하였으나 왜경의 감시가 날이 갈수록 심한지라 마음은 항상 우울하고 원통하기만 한데 왕년의 혹형받은 것이 이미 고질화되여 1935년 을해 오월 십사일 운명하니 향년이 58세였다. 신대리 화동종산 간좌언덕에 안장하다. 부인은 공이 가신 후 십오년 경인 십일월 오일에 졸하셔서 공의 묘 왼편에 합장하다. 이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재환이요 자차는 재서인데 백부에 출계하고 손자 종억 종백은 재환 소생이요. 종성 종진 종원 종길은 재서 소생이다. 아 공은 자질이 강정하고 호상하야 시골에서는 의열군자가 되고 조정에서는 염직한 신하였으니 수복지보가 있어야 할것인데 명도가 어겨짐이 많아서 조실 부모하고 온갖 고생을 격고 수도 길지 못하고 나라의 포상도 없으니 이 어찌 착한 자에 복이 온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의 높고 높은 의로운 소리와 혁혁한 슬기로운 자행은 천년을 가도 무궁할 것이다. 공이 가신후 44년 을유년에 하늘은 결국 이 겨레를 돌보사 왜놈들은 쥐구멍을 찾아 도망가고 국토는 광복되여 삼천만 동포가 다함께 자유를 즐기는데 지금 공을 황천밑에서 불러 일으켜서 오늘의 영광을 같이 못보는 것을 우리들은 통한하는 바이며 더구나 그 의열과 고절을 돌에 새기지 못하고 일주갑을 지낸것이 죄송하기 한이 없었던 차에 정석모 도지사와 양후석 본군군수와 이창복 본면 면장께서 공익 충효의열이 뛰어남을 알게 되자 유구한 세월에서 유덕이 민멸될 것을 민망히 생각하시어 입석 기적할 자금을 연조하여 풍화보금을 도모하고 윤강을 바로 잡는 모범이 되게 하니 향민들이 다같이 작약협찬하야 영역을 정화하고 이에 기적비를 세웠다. 이것이 공의 철천지한을 매만져 주지 못하나 공의 재천하신 연령에 대한 얼마간의 위로가 될는지요. 동사 여러분이 나더러 비문을 쓰라기에 나는 기혼불문자로서 사양타 못해 이에 공의 연보와 한국독립운동사에 의거하여 위와같이 펴노라. 서기 일구칠팔년 무오 광복절 전길림성장관 방문 서복장 홍재윤 근술병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