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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이름이 자연스럽게 만세봉(萬歲峰)이 되였다. 선생(先生)은 이 햇불 만세(萬歲)의 주모자로서 일본헌병(日本憲兵)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였으나 강철(强鐵)이라는 별명과 같이 굳은 선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개월반(一個月半)의 모진 고문을 받고 5월19일(五月十九日)에 6개월(六個月) 형(刑)을 받고 공주(公州)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붙잡혀갈때는 동리주민(洞里住民)을 앞장서 선도하는 혈기가 앙성한 청년(靑年)이었으나 동년(同年) 11월(十一月) 20일(二十日)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병자(病者)의 상태로 8개월(八個月)여만에 방면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 일로 가세(家勢)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부인(夫人)의 힘만으로는 가정을 지탱하기가 어려워서 특별(特別)한 치료나 요양이 없었으므로 복역중 모진 고문으로 허리와 가슴에 깊어진 병이 악화되어 시름시름 알타가 그렇게 기다리던 조국(祖國)의 815광복(八一五光復)이 된지 불과 5개월(五個月) 뒤인 1946년(一九四六年) 1월 30일(一月三十日) 50(五十)세를 일기로 한많은 일생(一生)을 마쳤다. 선생(先生)은 감옥에서 풀려나와서도 26년간(二十六年間) 기회만 있으면 이웃이나 마을주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이러한 공로가 인정디어 2003년(二千三年) 8월(八月) 15일(十五日) 정부로부터 대통령(大統領) 표창이 추서되었다. 이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면민(面民)의 이름으로 기념비를 세우다. 서기 2004년 4월 19일(西紀 二千四年 四月 十九日) 탄곡 이은우 근식(坦谷 李殷佑 謹識) 운산 윤병석 근찬(雲山 尹炳錫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