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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헌태는 경성제일고보(京城第一高普)를 다니던 중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북간도(北間島) 지린성[吉林省] 연길(延吉)로 망명하였다. 동년 음력 11월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간도전위대 소속 모연대장 이제안(李濟安)의 지휘 아래 북간도 지방에서 독립운동자금 및 동지규합을 위해 잠시 활동하다가, 국내로 돌아와 개성의 광진학교(廣進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26년 3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의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에 다녔다. 일본 유학 중 그는 동년 6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조선유학생연합웅변회(朝鮮留學生聯合雄辯會)에 참가하여 한국인의 해방을 호소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7년 5월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東京支會)가 세워질 때 간사를 맡아 활동하다가 일본대학 3학년을 중퇴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후 동년 12월 신간회 경성지회의 조직부 상무간사 등에 선임되어 각 지회 주최의 강연회에 연사로 참가하여 민지계발에 힘썼다. 그는 1928년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이를 재건하기 위해 이준열(李駿烈) 등과 함께 1929년 1월 조선공산당 잠정 조직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당의 잠정조직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로 개칭하고 야체이카·고려공산청년회·조선피압박동맹회 등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이때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조직부 임무를 맡았다. 그는 동지 포섭에 힘을 쏟아 민병회(閔丙會)를 비롯하여 고학당 출신 정관진(丁寬鎭)·김태래(金泰來)·김성기(金成琦)·박치우(朴治宇)·전진한(錢鎭漢) 등을 입회시키고 동년 3월 하순 고려공산청년회의 부서를 정하였다. 또한 그는 이준열 등과 함께 1929년 3월 고학당 내에 조직한 조선학생혁명당(朝鮮學生革命黨)을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 기반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학생전위동맹은 고려공산청년회 행동 조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서울지역 각 학교에 독서회를 설치하며 학생운동을 통할 지도하는 조직체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안상훈(安相勳) 등과 함께 열성자대회(熱誠者大會)를 추진하던 중 1929년 6월 당재조직준비위원회와 산하 고려공산청년회가 발각되면서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2년 7월 대전형무소로 이감 도중 ‘조선민족 독립만세’ 등을 외친 혐의로 징역 8월이 가형되어 7년 8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