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page


130page

양성에 진력하시다가 1908년 8월에 구한말 관부인 한성부에서 봉직한바있었으나 1910년 한일합의 비운을 맞아 일절 관직을 버리고 오로지 구국을 위한 출판사업으로 이문당을 개설하여 당시 소득한 누만의 거액을 임시정부에 헌반하였으며 경성서적조합장 경성신문사 이사장 조선경제인회 이사등 10유여년간 교육 출판 언론 실업 각계를 총하여 구국운동에 활약하시었고 1919년 3월 1일에는 천인지역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하시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충청도대표로 활약하든 중 독립운동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일시 귀향하셨다가 당진에서 피체되어 서울역에 도착하자 수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운집하여 분노의 눈물로 선생의 애국단충을 흠모하였다. 마침내 공주형무소에서 1년반동안 갖은 옥고를 겪었으며 귀향한후에도 농만계도와 민족정신개발에 전념하시었다. 1945년 8월 15일 민족이 해방되자 서산중학교를 창설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고 1946년 11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원에 취임하사 신생 대한민국의 개국사업에 전력하시다가 1947년 3월 옥고여수가 재발되어 서산제에서 별세하셨다. 선생의 재세중 국가와 사회에 끼친 공덕이 지대하였으므로 당시 입법의원의장 김규식박사를 비롯하여 내외인사들이 선생의 서거를 슬퍼하였다. 오호 선생이 살고가신 70여 성상의 한결같은 생애는 조국의 자주독립과 사회발전및 후진교육을 위한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