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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문 이재명 의사(李在明 義士)는 1888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은 하였으나 원래의 고향은 대대로 삶을 이어오고 있는 진안이 뿌리이기 때문에 이곳 진안이씨 제각 영사제 앞에 이 고장에서는 처음으로 순국 의사이신 이재명 의사의 동상을 세우게 되었다. 의사는 진안이씨 22세손으로서 1904년 "하와이"를 거쳐 도미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국권회복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1907년 10월에 귀국하였다. 의사는 을사오적의 괴수 매국노 이완용을 제거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결심하고 기회를 엿보던 중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 경 벨기에'의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명동성당에서 나오는 이완용을 비수를 들고 달려들어 잡아 눕히고 허리 어깨 등을 세 번이나 찔러 유혈이 낭자하였다. 의사는 이완용이 죽은 줄로 알고 연거푸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던 중 일경에게 왼쪽 넓적다리를 찔리어 중상을 입고 피체(被逮)되었다. 매국노 이완용은 즉시 병원으로 운반되어 일경의 치료로 잔명을 보존, 경술 합병서에 날인까지 하고 일제의 일등공 신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의사는 서울지방재판소에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 첫날부터 모여드는 군중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재판은 공개되어 영, 미, 불 등 외국인사들도 다수 방청하였다. 재판장 塚原(총원)이 “피고와 같이 兇行(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하고 물음에 의사는 눈을 부릅뜨고 “야만섬나라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兇(흉)자만 알았지 義(의)자를 모르느냐. 나는 兇行(흉행)이 아니고 義行(의행)을 한 것이다.”하고 고함치자 재판정 내외 방청석은 물을 끼얹은 듯 정숙하였다. 이튿날 재판이 계속되어 재판장은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하니 의사는 "찬성한 사람은 이천만 민족이다”할 때 창안 창밖으로부터 "옳다"하는 소리가 폭발하였다. 7일째 의사는 이완용의 8조목에 걸친 죄악을 일일이 설파한 다음 자리에 앉으니 검사는 의사에게 사형을 구형하였고, 1910년 5월 18일 재판장 塚原(총원)이 사형을 언도하였다. 의사는 항소하였으나 재판장 楠(남)이 사형을 언도하자 재판장을 꾸짖고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뺏기는 하나 나의 충혼을 뺏지는 못할 것이다." 하며 1910년 12월 23일 조용히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몸은 비록 가셨으나 의사의 거룩한 애국애족의 정신은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으리라. 이 의거의 동모자로 수난한 이는 아래와 같다. 조창호, 이동수, 김정익 - 징역 15년, 전태선, 김병록, 김용문 - 징역 10년, 박태은 – 징역 7년, 김이걸, 이응삼, 김동현 - 징역 5년, 이연수 - 징역 1년 6월 1962년 3월 1일 이재명 의사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복장)이 추서되었다. 사단법인 이재명의사추모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