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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분께 물어보니, 저 산 위에 보이는 묘소라고 한다. 유창순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채기중·유장렬·한훈·강순필·김병렬·정만교·김상오·정운홍·정진화등과 함께 1913년 풍기에서 풍기광복단을 결성하였다. 주로 의병적 성향의 인물이 참여했던 풍기광복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실천방략을 두고 독립운동을 폈다. 그후 그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하여 1915년 대한광복회를 결성할 때 이에 참가하여 친일부호 처단에 앞장섰다. 동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혁명기지로는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경상도 지방의 친일부호를 조사하여 명단을 작성하는 한편 그들에게 보내는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발송하는 등 친일부호 처단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했다. 그리하여 1917년 11월에는 채기중·강순필·임봉주등과 함께 칠곡의 친일부호 장승원을 처단하였으며, 이때 동회의 처단고시문을 붙임으로써 광복회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1918년 피체되었고, 10여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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