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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 문하에서 수학하여 선비의 품격과 바탕을 갖추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매 공은 비분강개 끝에 동지를 규합하여 항일투쟁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번질 무렵 공은 조상규 조경식 조석규 조주규 외 여러 동지들과 비밀리에 서산서원에 모여 의거할 것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준비하여 3월 19일 함안읍의거에 앞장섰다. 이에 동지 수십명이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공은 탈출하여 군북으로 돌아와 다음날인 3월 20일 다시 의거에 앞장섰다. 이 날의 군북의거는 미리 약속한 결사투쟁으로 사방에서 운집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와 선언문을 나누어주고 군북 천변에서 선포식을 갖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니 그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때 일경과의 충돌로 흥분한 군중이 주재소에 투석하자 마산에서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함으로써 현장에서 20명이 순절했고 많은 부상자가 생겼다. 공은 왼팔에 관통사을 입고 주동자로 체포되어 그해 12월에 2년 징역혀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서 형고를 치루었다. 그때 당한 고문 탓으로 출옥 후에도 평생을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옛 동지들과의 만세계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대망의 조국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그 기쁨도 잠간뿐 1950년 8월 9일 75세로 영서하였다. 배는 남평문씨 덕우의 따님으로 슬하에 1남 2녀이다. 남은 용석이며 여서에 인천이원근 성산 이호직이다. 1958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표창이 추서되고 정부의 애국지사 묘역정화사업에 따라 여기에 공의 행적을 새기게 됨은 그 위훈에 보답하는 당연한 도리이며 광복된 조국에 삶을 누리는 자 어찌 공과 같은 우국선열의 운공을 촌시인들 잊을 수 있으리요. 그 거룩한 호국정신과 민족번영을 향한 정열은 자자손손 만대에 영원히 귀감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