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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이 임박하였음을 외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임석한 경찰서장 등 왜구에게 피랍되어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다가 1941년 8월 27일에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일제의 소위 육군형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월의 실형을 언도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1943년 4월에 형기를 마치고 나니 피골이 상접하여 사경에 이른 몸을 치유하며 농사에 전념하다가 몽매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혼탁한 사회의 안녕질서를 유지하는데 정력을 경주하여 효제충신과 수신제가로 향사를 교화하고 만년에는 임천에 은거하여 안빈낙도하다가 1982년에는 대통령포창과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고 1997년 정축 6월 5일에 수74로 졸하였다. 공의 관은 성산으로 고려 사재동정 휘 무재가 상조요 조선기초에 병조판서 시 정무동산 선생과 퇴도문인인 남기지평 황곡선생 휘 칭이 현조이고 고는 휘 호성이요 비는 함안 조 성웅의 여이며 생고는 휘 호두이고 비는 회산감재진의 여요 배는 경주 최원만의 여와 순흥안 상술의 여이다. 2남 3녀를 낳았으니 맏이 근생은 생정백부 준숙의 후로 출계하였고 다음은 근덕이며 여는 함안 조종래와 금령 김녕 김보칠과 은진 송금준에게 출가하였다. 하루는 독립유공자유족회 조현제 회장이 공의 유공비 건립추진회를 구성하고 그 책임자로서 반궁을 찾아와서 나에게 비문을 청하거늘 경숙이 천학하여 사양하였으나 그 정이 더욱 간절하고 족의로서 고사할 수 없어 졸렬함을 무릅쓰고 경상남도 항일독립운동인물록 및 사적과 함안 항일독립운동사에 의하여 이와 같이 서하고 이어서 명에 왈 아아! 우리 이씨는 대대로 충의에 독실하여 공이 그 선세의 아름다움을 이었구나. 홍안의 몸으로 왜적의 만행에 비분강개하여 운집한 군중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