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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세우고 길게 휘파람을 불어 적의 시선을 끈 다음 말 위에서 일어섰는가 하면 누웠고, 누웠는가 하면 일어서며 숨었다 나타났다 하면서 왔다 갔다 내달리니, 많은 왜적이 넋을 잃고 그 신기함을 보고 있다가 장군을 사로잡기로 작정하고 앞 다투어 쫓아오자 장군이 도망가는 체 가다 서다 왜적을 들판으로 유인하여 놓고 갑자기 되돌아서면서 큰 칼로 참살(斬殺)하고 복병(伏兵)이 일제히 내달아 순식간에 왜적을 모조리 섬멸(殲滅)하여 목사와 백성을 구출하였다. 이는 이제까지 패하기만 하던 왜적과의 전투에서 처음 이룩한 전첩이고, 적의 예봉(銳鋒)을 꺾은 큰 전공(戰功)이다. 이 여세(餘勢)를 몰아 화령(化寧)에서 석차(石車)로 많은 적을 몰살하였고, 11월에 화공(火攻)으로 상주성을 수복하였으며, 12월에는 당교(唐橋)의 왜진(倭陳)을 격파하고 대승산(大乘山)까지 추격하여 산양(山陽). 용궁(龍宮). 예천(醴泉) 등 여러 읍의 백성을 보호(保護)함으로써 상주 전체가 평온을 되찾고, 조령에 적병의 왕래가 끊기게 되어 왜란의 평정에 크게 기여하였으니, 어찌 그 공이 적다하겠는가. 이 전적(戰績)은 『매헌실기(梅軒實記)』와 향사(鄕史)에 전해 오고 있다. 장군은 상주 임소(任所)에서 판관겸 진관병마절제도위(鎭官兵馬節制都尉). 목사겸 감사군대장(敢死軍大將). 토포사(討捕使). 토왜대장(討倭大將). 절충장군경상우도병마절도사(折衝將軍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고, 임금의 전지(傳旨)를 받들어 둔전(屯田)을 조치(措置)하여 군량미(軍糧米)에 대비하였다. 그 후 여러 곳의 도호부사(都護府使)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내고 마침내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에 올랐다. 장군의 초휘(初諱)는 무수(茂壽)이며, 선조(宣祖)의 명(命)에 의하여 기룡(起龍)으로 개명하였고, 자(字)는 경운(景雲)이며, 관(貫)은 진양(晋陽)이고, 호(號)는 매헌(梅軒)이며, 시호(諡號)는 충의공(忠毅公)이다. 상주의 옛 충렬사(忠烈祠)에 봉향하였고, 지금의 충의사(忠毅祠)에 봉향(奉享)하고 있다. 아 아! 장군의 호국위적(護國偉蹟)은 사책(史冊)에 길이 빛났고, 이를 본받아 3.1운동 때는 이 고장에서 의거(義擧)하여 여러 의사(義士)의 공적비가 용화(龍華)에 서고, 용유(龍遊)에 광복의사단(光復義士壇)이 있어 장군의 정신이 또한 살아 있다. 이에 국토 통일의 염원(念願)이 절실한 지금 장군이 국난을 극복한 공훈(功勳)을 돌에 새겨 그 정신을 본받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여기에 전첩비(戰捷碑)를 세운다. 출처 : 상주시 용화면 사무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