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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그는 일본 대판중학교 야간에 재학중인 1941년 9월에 학우 전영수로부터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선청년학생이 주동이 되어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에 뜻을 모으고 항일투쟁에 앞장서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활동조직으로서 충성회를 조직하고, 1942년 12월까지 30여차례의 모임을 갖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동회의 운동방략으로는 고향에 야간사숙을 열고 수시로 귀국하여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국제정세를 주시하고 일·소가 개전하면 즉시 귀국하여 국내의 청소년층을 지도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독립운동이 실패하였던 것은 실력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라 분석하고 실력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안중근과 같은 선각자의 충정을 본받아 항일정신을 길러갔다. 그러던 중 동조직의 활동이 발각됨으로써 1942년 12월에 그는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 후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2월,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이상 3년이하의 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