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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용 박관영 이내성 장용희 님 외 여러 동지와 손을 잡고 지금과 같은 구국운동방법으로 국권을 찾고자 함은 백년을 기다림과 같으니 우리는 다 같이 결사대원이 되어 직접 행동으로 옮길 것을 맹세하고 먼저 그때 대구의 주요기관이던 도청 경찰부 조선은행 식산은행 지점 등을 폭파하기로 뜻을 모아 김기용 님의 주선으로 화약을 구입하여 폭탄을 만든 다음 장진홍 님으로 하여금 조선은행대구지점에 던지게 하니 때는 1927년 10월 27일이다. 이로 인한 왜경의 수사망을 벗어나 자아진홍 님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왜경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한국노동자를 상대로 숙박소를 차려놓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투쟁과 구국사상을 불어넣으며 활동타가 왜경에 알려져 옥고를 치르고 계속 동지를 찾아 투쟁을 펼칠 무렵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이 있은지 2년만에 간악한 무리의 밀고로 장진홍 님과 함께 왜경에 붙잡혀 1년의 예심 및 1심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에서 폭발물 취체 및 살인예비죄로 1년 6월의 옥고를 치를 때 뜻하지 않은 장진흥 님의 옥중 죽음이 생기자 선생은 옥내 여러 동지와 연락하여 옥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진홍 님의 죽음을 밝히려다 건조물 파괴죄로 8월의 옥고를 더 치르게 됐다. 대구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옛 동지들과 얼굴을 맞대고 구국단을 만들어 앞으로 큰 일을 꾀하려던 것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왜경에 안바 되어 여러 동지와 함께 1년 6월의 옥고를 비롯하여 전후 5년의 옥고를 치리고 많은 예비검속을 겪다가 조국광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