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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넓은 경윤을 내세웠다. 그러나 기둥 하나가 받치기엔 큰 집이 너무 기울어졌다. 왜적의 침략은 한층 심해지고 반역의 무리들이 더욱 날뛰니 다시 격문을 펴 그들을 꾸짖다가 왜병에게 잡히오 넉 달의 옥고를 치른 뒤 벼슬을 내던지니 1905년이다. 정치가로서 그의 포부를 펴지 못한 선생은 경상 충청 전라 세 땅이 맞닿는 삼도봉 밑에 숨어 각 도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새로운 무장 투쟁의 길을 찾았다. 1907년 나라의 심장부인 경기에서 두번째 깃발을 들어 양주 포천 철원 강화등지를 달리며 적과 맞서 싸웠고 온 나라에 흩어져 있는 의병들을 묶어 연한 진용을 만들고 선생은 군사장이 되었다. 적 침략의 거점인 이른바 통감부를 무찌르고 수도를 탈환하여 왜적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려는 작전으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다른 의진들은 약정한 시각에 닿지 못하여서 선생이 몸소 거느린 삼백의 결사대만이 동대문 밖까지 쳐들어가 고군분투하다가 물러섰으니 나라의 아픔이요 역사의 슬픔이다.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이 피 어린 길을 선생의 호를 따 왕산로라 정하였음은 그 구국정신을 길이 살리기 위함이다. 다시 일어설것을 꾀하며 경기 강원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1908년 6월 영평군 유동에서 왜병에게 잡히니 하늘은 정녕 이 나라를 버리었단 말인가 적장마저도 선생의 애국심과 인품을 우러러 구명운동을 폈지만 그해 9월 21일 쉰네살을 일기로 서대문 옥에서 기어이 가시고말았다. 온 백성들의 슬픔이 사무쳐 하늘은 빛을 잃었고 삼천리의 산과 물도 노여워 울부짖었다. 선생은 1855년 4월 2일 이 고을 구미 땅 임은리에서 나시나 대대로 선비의 집안이요 허조님의 네째 아들이다. 의롭고 슬기로운 내림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뜻이 높고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학식과 덕망이 당대에 떨친 맏형 훈에게 글을 배웠다. 슬하에 학, 영, 준, 국의 네 아들을 두었으나 어버이 가시고 나라 망하자 숙부 겸을 따라 북만주 해삼위등지에서 광복운동에 활약하다가 모두 그 곳에 뼈를 묻었으며 남은 동지들도 나라 안팎에서 투쟁을 계속하여 광복의 날을 맞이하였으니 한말 구국운동은 임에서 샘솟아 그 줄기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