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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 3.1운동 약사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에 일어났다. 이 날 신명학교의 교사 이재인, 졸업생 임봉선, 이선애등과 50여명의 전교생이 한마음이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추애경, 최정술을 비롯한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대구 만세운동의 시랄점인 큰 장터에서 이영현을 비롯한 통학생들은 동산교 근처에서 그리고 김학진을 비롯한 20여명의 기숙사생들은 약전 골목에서 시민들과 합류함으로써 대구의 만세운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이에 다급해진 일본경찰은 헌병과 육군병력을 동원하여 총칼로써 우리 학생들과 시위 군중들을 마구 두들겨 패면서 잡아갔다. 이때 붙잡힌 여학생들은 두 주간 구류에 처해졌으며, 이선애는 6월, 이재인, 임봉선은 1년 등 실형을 선고받고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치렀다. 그 밖에 거사 전날 밤 내교하여 밤을 새우며 태극기를 만들고 고향 부모님께 유서를 쓰며 비장한 각오로 거사를 준비하던 본교생들을 격려한 김무생은 2년, 박재원은 1년 6월, 그리고 신명학교 재직 당시에 학생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심어 주었던 이만집은 3년, 김영서는 2년, 권희윤은 1년 6월, 신태근은 6월의 징역 선고를 받았다. 신명의 3.1만세운동은 국권 회복과 여권 신장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애국부인회와 조선여자기독청년회의 활동을 통해서 꾸준히 계승,발전되었으며,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