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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사 심연 송두환선생 애국공적 심연 송두환선생은 서기 1892년 임진 12월 27일 대구에서 출생하여 국난의 격동기에 성장하면서 일찍부터 우국청연으로 알려졌으며 경술치욕에 통분 배일운동의 뜻을 굳게 간직하시고 다음 해에 상경 경성보성학교에 입학하여 재학중 민족산업에 착안하여 홍진의 김두봉 주시경등 일부 교수및 학우들과 일제 경제수탈정책에 항거하여 국산진흥을 계도하는 산직장려계를 조직하고 회장에 피선 회원3천명 가맹의 성과를 보았으나 왜헌의 탄압으로 해산되었으며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신배달회를 조직하고 경북 하양에 비밀공작의 거점을 두었다. 보성학교를 졸업한 1915년부터 시야를 넓혀 만주 서배리아를 편답. 그곳 재외동지들과 항일전선의 국내외연결을 협의하고 세계대전종식과 파리강화회의를 계기로하여 산직계발기동인들과 3.1독립운동의 거족적 전개를 획책 천도교의 손병희교령으로부터 종교단체동원 쾌락을 얻고 하향하여 영남일원의 3.1운동선도를 맡았다. 선생께서는 3.1운동을 전기로 하여 독립운동을 무력전술로 바꾸어 무기구입차 최해규동지를 만주에 파견하는 한편 대구및 신의주에 사재로 지하공작거점을 구축하고 이어서 11월에 선생께서 직접 상해임정을 방문 이동? 이시영 두분을 비롯 여러 요인들과 접촉하여 국내활동요강을 합의하고 회로 심양에서 김종철 김명제동지들과 무장전략을 협의후 신의주에서 송?욱연락책에게 새 임무를 지시하고 12월에 귀국 이어서 달성군내 소작종 2300호를 결속하여 일인지주의 수탈에 항거하는 빈민회를 조직, 영남농민운동의 기원을 이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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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부터 박종식동지와 함께 마산.대구에서 구금 석방의 수난을 거듭하다가 9월에 중국으로 잠행, 이순동지와 전략을 밀의하고 12월에 귀국하자 곧 피검, 익년 2월에 방면되었으나 무장단원 김승호와의 연계혐의로 대구에서 체포되어 신의주서로 압송 살인적고문을 받으면서도 시종 묵비를 고수하여 12년 구형이 10형으로 판결되었다. 어시호 관헌들로 하여금 생사에 초연한 선생의 의지와 동지애에 외경을 불금케했으며 출옥후에는 한동안 의거 1927년부터 신간회 경북지부회장으로 활동중 29년에 강제해산당하고 이래 요시찰인물로서 수시 예비검속등 가진 박해를 받으면서 일제패망까지 침략전과 민족동화정책을 거부하는 민족자주정신운동에 전념하였다. 일제학정 36년간 줄곧 장정의 구구전선을 지켜오신 선생께서는 광복 건국과정에 나타난 비민주세력의 발호와 국토분단 민족분열에 직면하여 백농 이동하동지와 함께 민주건설 민족통일의 대명제하에 제2의 건국운동을 이끌어 오시다가 1969년 신축 5월 28일 민족의 선구자이신 풍모 그대로 영면하셨으며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엄수하고 독립의사로 추서하여 거레의 사표이심을 거듭밝혔다. 이에 삼가 선생의 구국공적 개요를 명하여 영세불망 호국교정으로 경송하옵고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