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page


349page

1월에는 공도 도일하여 재동경 조형길 최수원 강증용동지등과 누차 밀회를 가져 조직확대 강화 해외 독립운동단체와의 접선 결정적 행동방책등을 모의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저단금이라 명명 일천만원모금액을 결의하고 공은 국내책임자로 선임되였다.공은 일본국내의 전시사정을 살피고 환국하여 저단금모금등 항일운동에 전념하던중 왜경에 탐지되어 동지 18명 전원이 대구경찰서 고등계에 피검되여 혹독한 고문으로 1년여의 예심끝에 동44년 6월 왜적 고도신예랑 김형부....재판에서 3년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즉석에서 상고를 포기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조국광복으로 출옥한 애국지사였다. 공은 일제의??에서 벗어난 뒤는 고향에서 식산흥업에 힘쓰면서 지방의화와 사회사업에 정열으르 불어넣고 애국애향하였다, 1953년 10월 성서면 의회초대의장 동56년 10월 달성군 참사회 부의장 동57년 4월 달성군 교육청 교육위원에 당선되였으며 동년 10월에 대구시의회 의원 동59년 11월 동의회 건설분과위원장에 피선되였으며 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시의회의 시정??위원으로 선임되였으며 67년 1월 1일 달성농지개량조합장에 피임되더니 69년 1월에 5차연임되어 대구와 창녕을 포함한 달성군 일원 수리사업에 혁공을 세웠다. 취중 낙동강제방공사는 위국택민의 대성사가 않일수 없다. 공은 1953년 12월 부터 동 64년 12월까지 총 11개년에 걸쳐 중앙과 지방관서에 수백차 왕래하면서 천신만고의 고초를 겪고 이 대역사를 완수하였으나 한분의 ??없음은 물론 사재마져 쾌척하였으며 천여필의 각종부지 국유이전등기업무도 농민부담을 염려 친히 실행하는 등 공의 문전옥답30 여두락을 바쳐 준역하였으니 어찌 갸륵치않으리오, 이 제방은 폭50미터에 전장 6km에 달하는 대공사고 ?리면?800정이 옥토로 화해저 년간 사만수천석을 생산하는 만년풍작의 옥야를 이룩하였다. 아울러 공은 달성농지개량조합장으로 재직하면서 동년 평야의 년간 7억원에 달하는 내수피해를 막기위하여 대단위 배수장 2개소와 천여미터의 턴넬을 통한 양수장을 설치하여 대한불가의 옥토를 이룩하였으니 향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공은 의지가 굳세고 끈기있고 슬기로운 대장부로서 사생취의하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