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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동유래비. 와룡산정기가 크게 돌올한 이곳은 김녕김씨 백촌 김문기선생의 후손 응수씨의 세거지다. 이분은 임란을 계골에서 피신하셨다한다. 난이 평정되자 경주이씨 수성나씨 군위방씨 방바지 사람이 이곳에 모여 자리잡아 술터 다섯군데 심은 나무가 성장하여 녹음이 짙어 정자나무라고 마을 이름도 오정동이라했다. 동서는 마을을 감싸주는 돌올이 있고 앞에 방대하게 흐르는 낙동강이 있어 경관이 좋았다. 영조 26년 서기 1760년 김악소께서 보리3석 벼3석 목화25근 내놓은 것을 기금으로 수해를 막기위해 마을앞 국도남쪽 500미터 지점에 길이 500미터의 보을 쌓자 신당이라했다. 이 비는 문화 경제 역사자료로서 소중할 것이다. 영조께서 거주자유를 포고하시지 김해김씨 능성구씨 인동장씨 밀성박씨 경주최씨 영산신씨 단양우씨 달성배씨 옥천전씨 의성김씨 야성송씨 창녕조씨 성산이씨 진주강씨 함안조씨 성주도씨 제성씨가 연줄로 운집하여 정조때에는 큰 부락이 되지 서당도 지었다. 이곳은 삶의 명당인지라 인재가 많이 나고 자인규수가 이곳 낭자와 혼담이 있자 그의 부모가 고곳은 메마른 곳이라 시집가면 고생한다하이 자인 경산 오는 비가 신당서촌 아니오리'하고 노래한것을 보나 또 '이 고장에서 자라난 처녀들은 시집갈때까지 쌀서말을 못먹고 간다'는 속담을 보더라도 먹고살기 어렵다는 것을 알수있다. 성서평야는 낙동강 갯가인데 보리가 생산되자 삶의 갯가 '살미개'라고 불렀다. 그러나 마을사람 경작지는 일부분에 불과했다. 1920.30년대는 자손이 번창하여 생활고가 더욱 심하여지자 일본으로 이민간 사람도 부지기수고 애국지사들은 북간도로 넘어간 사람도 있었다. 최찬교께서 훈장이 되시자 전동민이 배움의 길로 나섰으나 불행하게도 왜정이 서당을 징발하여 경찰관주재소로 사용했다. 선생께서는 좌절하자 않고 사숙으로 많은 유생을 배출했고 장석희 박병효선생꼐서도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중에 성서면장을 역임하신분은 전경호 최종제 전영기 박영수씨등이다. 전영기씨는 세세년년 한발이 극심하여 1942년초에 성서면 전농지에 급수할수있는 수리사업계획서를 작성 군수 지사에 수차 건의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거듭하여 안건을 상부기관에 제출하고 애쓴 보람있어 급기야 1944년말에 인가를 얻고 1946년 공사가 완료되자 한발의 피해를 덜게되었다. 인가를 받는 과정 무많은 경비를 부담했다. 그 고적은 천추만대후에도 동네수로동굴은 말할것이다. 박광택씨는 이곡지 못둑이 무너질 단계에 놓인것을 사재로서 보수하여 몽리자에 온정을 베풀었고 인자하시고 덕망이 높은 것을 대구향교에서 알고 석존대제종헌관으로 선임된바 있다. 1973년 3월 15일 신당동주심 45명이 출자한 52100원을 기금으로 성서마을 금고를 창설하여 현재 운영자금이 400억이 되며 주민금융으로서 지역발전과 복지사업에 크게 이바지하고있다. 지금 이 고장의 아파트 숲 살미게는 대단지공단으로 변모되어 옛모습을 완전히 잃게되자 동민들이 애통하게 여겨 동대표가 문헌을 가지고 와서 청함으로 두서없이 서했으나 앞으로 후세들에게 어렵게 살면서도 교육을 중대시하고 많은 업적을 이룩한 선대의 큰 뜻을 알게하고 길이 애향심을 심어주고자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