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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相敦(서상돈) 1850~1913 서상돈 조선 고종때의 민족운동가 서상돈은 1850년 10월 경북 김천시 지좌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866년 병인사옥 당시 천주교신자 박해를 피해 대구로 피난하여 왔다고 전해진다. 서상돈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대구 천주교인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하여 대구제일의 거상이 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친척들의 고난과 순교를 목격한 뒤부터 천주교의 전교활동과 구제·자선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일생동안 천주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1894년에서 1903년까지 정삼품 통정대부, 탁지부 세무시찰관으로 경상도의 세정을 총괄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부설 만민공동회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 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서상돈은 교육사업을 지원하고 그 운영을 도왔다. 1899년 계산동성당 부속건물에 한문서당인 해성제)를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1908년에는 이 해성제를 성립학교로 바꾸어 개교하였다. 1905년 달서여학교를 설립을 적극 지원했으며 1906년에는 교과서, 계몽잡지, 신문, 교양서적 등을 발간하기 위한 대구광문사를 조직하였다. 1907년 대구광문사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원을 보상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신분을 초월한 전국의 모든 남녀노소들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났고 이 운동을 제안한 서상돈은 1913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