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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명리에 팔려 불의를 서슴치않고 행하는 이가 있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홍모와 같이 가볍게 여기는 이가 있다. 그런데 전자는 언제나 하사처럼 많지만 후자는 항상 혜성보다도 드문것이 이 세상의 실태인것은 애닯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현상은 난세일수록 더욱 심한것을 보게된다. 구 한말 이씨왕조의 국세가 날로 기울어저가고 왜적의 침략으로 민족의 운명이 누란과 같은 위국에 빠져들어갈 적에 어떤 사람이 감히 이에 항거하여 궐기하였던가? 전사가 아니고 누구였겼는가? 중호 임용상의사는 혜성중의 한개의 별이요 의사중의도 ?초였던것이다. 의사는 용모가 청수하고 천품이 강직하며 작질이 영오하여 경서에 통달하고 특히 병서에 조예가 깊었다. 1905년 시년이 29세때에 급진적으로 제국주의에 광분한 왜적이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맺어 침략의 마수를 노골적으로 들어내게되자 이 소식을 듣고 이에 분격한 의사는 분연히 향리를 떠나 동해 일우에 있는 영덕군 청련사에서 마수전원차등 뜻있는 인사들과 함께 널리 의병을 규합하여 창의군을 편성하니 그는 곧 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영덕, 강구, 여해, 영일, 장?등지에서 유격전?을 사용하여 왜병과 용감한 혈전을 여러번 거듭하여 왜적을 격명하였다.1906년 도찰사 정환직선생이 광무황제의 밀소를 받고 그의 아드님 정용기대장으로 하여금 산남의진을 창건하게하매 의사는 창의군을 이끌고 그의 의진에 일진하여 울산, 언양, 양산, 밀양, 창녕, 진주, 경산, 청도,의령, 의흥, 군위, 의성등 영남 각지에서 전후 7년간 수십회의 접전을 통하여 되어린 고전분투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1907년 5월20일 청하지방에서 왜병을 공격하다가 중과부적으로 가열한 격전끝에 그들의 포위망에 걸려 잡히게 되었다.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으나 한일합방을 꾀하는 일제통감부의 회유정책으로 이듬해 4월에 석방되었다. 의사는 다시 옛동지를 규합하여 불굴의 정신으로 중군에 장준격의사, 참모에 권석출의사로 의진을 정돈하여 항전을 계속하다가 의성, 안년전투에서 다시 체포되어 한일합방으로 사형을 겨우 면하고 10년형의 선고를 받아 대구감옥에서 영어의 생활을 계속하다가 3.1운동 다음해에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였다. 의사는 그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에 정진하여 혹은 국내에서 혹은 만주에 왕래아며 독립군의 군자금 조달에 전력하다가 교회에 임한 노구로 광복을 맞이하여 정의는 이긴다는 감격과 환호의 절규를 올렸던것이다. 의사는 일생의 전생예를 오직 조국광복을 위하여 전후 3차례에 걸쳐 15년간의 옥고를 겪고 산하백전에 7년간의 혈전고투는 우리 겨레의 영원한 사표가 될것을 확신하여 이에 후생의 귀감을 삼고저 이 동상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