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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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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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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백 이상백 박사는 월성이공 시우 선생의 제3남으로 1903년 음 8월 5일 대구시에서 탄생하였다. 천자가 준수영오하여 일찌기 백부 소남 일우옹이 지사 양성을 목적으로 창설한 우현서루에서 수학하고 대구고보를 거쳐 일본의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를 졸업한 후 다시 중국에 가서 그 창축을 더욱 섬부하게 하였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후진 훈도에 진췌하는 동시에 학술연구에 몰두하여 한국문화사 연구 논고 이조건국의 연구 등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여 우리 학계에 커다란 성좌를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 학가원회원에 당선되고 1955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박사는 체육면에도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여 일찌기 일본 체육계에서 활약할 당시 어려운 세태에도 불구하고 한국 체육인의 국제 무대 진출의 터전을 마련하기에 노력하였고 8.15 후 아직 미군정하에 있을때에도 대한올림픽위원회를 조직하여 국제올림픽에 참가하는 독립국가로서의 자격을 얻는데 성공하였으며 1948년에 아세아경기연맹의 회원국으로 정식 가맹 자신이 실행위원으로 피선되고 널리 세계적으로 아마츄어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바 있어 1964년 국제올림픽위원으로 추대되어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일층 높이었다. 박사는 한국사회 학회장 동아문화연구소장 및 대한올림픽위원장을 비롯하여 여러 단체의 위원 또는 회원으로 우리 문화계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므로 1963년에 건국문화훈장을 수상하고 墺地利(오지리:오스트리아), 일본 등 외국 정부에서도 공로훈장을 수여하여 그 공적을 찬양하였다. 박사는 비록 1966년 4월 14일 64세란 아까운 나이로 타계하였으나 그 고매한 인격과 수많은 업적은 일월과 함께 길이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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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에 대한 내용은 없다. 공훈록에는 경북 칠곡으로 되어있고 서로 생졸의 년도가 다르다. 이상백은 경상북도 칠곡(漆谷)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 인동면 진평동(仁同面眞坪洞)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인동교회의 목사로서 대구(大邱) 서문외(西門外) 시장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3월 7일 이곳에 온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인 이영식(李永植)과 만나 독립선언서 20매를 전해받고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그는 자기의 집에서 이영식·이내성(李乃成)·이범성(李範成)·이영래(李榮來)·임점석(林占錫)·임용섭(林龍燮)·박명언(朴明彦)·권영해(權永海)·허도언(許道彦) 등과 다시 만나, 3월 12일 오후 8시로 거사일을 정하고 사전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는 권용섭(權龍燮)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필사로 제작하고, 3월 11일에는 자기집에서 이영식·이영래·임점석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2일 오후 8시, 동리 뒷산기슭에 3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영식과 교대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곧 독립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 이를 앞당기기 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시위는 밤이 늦도록 전개되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주동자 8명이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