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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서 양산대 제조공장을 차려 자수성가하였다. 그 당시 국내외에서 국권회복운동에 활동 중이던 애국지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는 한편 꿈에도 그리던 조국 광복을 위해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무진회와 조선문제시국연구회를 조직하고 동지 규합에 힘쓰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에도 협조하여 오다가 세계 2차대전이 치열하여 국제정세를 관망하던 중 1942년 3월 5일 이 사실을 탐지한 왜경에게 동지 한 사람이 체포되고 연이어 동지 5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로 7년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1943년 12월 10일 기각되어 원심대로 형이 확정되어 청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4년 봄에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으나 잔인한 왜경의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이 뼈골에 숨어들어 악화일로에 이르더니 회복치 못하고 동년 10월 26일 꿈에도 잊지못한 조국 광복을 목전에 두고 한많은 일생을 쓸쓸한 감방에서 지켜보는 사람 하나없이 운명하니 어찌 눈인들 감겼으리요. 애국지사의 말로가 어이 이다지도 험하였는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붉게 하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이다. 시신은 대전형무소 공동묘지 일우에 매장되었다가 광복 후 그리던 고향으로 운구 가족장으로 선영인 대덕산 기슭 건좌에 예장하였다. 해방 후 지사의 기간 행적을 알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연고지인 청진○○북이며 대전은 6.25때 잿더미가 되어 일본 동경에 가서 관계기관에 문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지성이면 감천으로 노력한 보람 있어 부산에 있는 국가중요문서보관소에서 판결문 원본을 입수하여 2005년 11월 17일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하였다. 유족으로는 배 경주이씨와 슬하에 1남 4녀로 남에는 종성이고 자부는 인천이씨이다. 장녀는 김해인 김석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