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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902년 5월 12일 이 고장의 본바닥인 남산동에서 수원 백씨의 후예로 태어나셨다. 소시적부터 감성이 예민하고 의기가 장한 선생은 대구고보에 진학해서는 일끼기 문학에 뜻을 두고 죽마의 벗인 이상화 형제들과 '거화'라는 동인지를 펴내는 등 습작기를 가지셨다. 또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도 대열의 선봉으로 활약하여다가 일제 관헌에 피검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이라는 선고를 받고 출감 그 때부터 광복의 그 날까지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낙인이 찍혀 지내셨다. 그 이듬해인 1920년 선생은 동경으로 건너가 와서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하면서 詩의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 1923년 '개벽'지에 '고별','예술'등 낭만적 저항시를 발표하고 아울러 그때 함께 유학생이던 양주동 유엽 손진태 등과 어울리며 동인지 '금성'을 창간하니 이야말로 이땅 자유시의 샛별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선생은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게 되는데 고국에 돌아와서도 시작과 그 발표 활동을 계속하면서 1926년에는 당시의 시인 28명의 시를 수록한 한국 최초의 앤솔러지 '조선시인선집'을 손수 편찬하기도 하셨다. 그리고 선생은 일시 사립학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일제 치하에서는 그 사회적 활동에 제약을 받아 곧 그만두고 생계를 비롯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결코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일제가 기승을 부리던 1936년부터는 북만주 빈강성으로 피신해가서 광복되던 1945년까지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8.15후 선생은 1946년 대구시보사 주필을 비롯해 줄곧 향토 언론계에 몸을 담고서 한편 '상화와 고월','씨뿌린 사람들'등 향토 출신의 애국지사와 예술가들의 문집과 전기를 집필 발간하여 그 추모와 선양에 전심하였으며 또한 각 문화 예술 단체의 창건과 그 육성에 전력을 기울이셨다. 이러한 선생의 철저하고 열렬한 향토애는 지금도 시민들이 애창하는 선생의 작사 '대구시민의 노래'에 그대로 담겨져 있고 쪼 저러한 선생의 몰아적 헌신을 기리는 후진들이 1963년에는 '대구 시민 문화상'을 드린 바도 있다. 그러나 선생은 1961년 발병하여 오랜 병고끝에 1968년 8월 7일 이승을 떠나시니 향년이 78세 이었으며 그 장레는 경북 3.1동지회가 주관하여 신암동 선열 공원에 안장하였다. 실로 선생은 이 나라 신문학 초창기의 영롱한 시인이요 곧은 절개의 민족 지사요 또한 향토문화 건설의 선구자로서 선생의 그 드맑은 시혼과 드높은 민족혼고 뜨거운 향토애를 추모하는 후학과 후지늗ㄹ이 이 유서깊은 두류 공원에 돌 하나를 세워서 그 빛나는 삶을 길이 전하는 바이다. 1991년 6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