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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影 趙氣虹 志士 紀念碑(운영 조기홍 지사 기념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위하여 항일독립운동에 몸바치신 애국지사 한 분이 여기 의연한 모습으로 좌정하시어 사회의 추앙과 존경을 받으며 뜻있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 분이 바로 운영 조기홍 지사이시다. 지사님은 1883년 7월 24일 성향 함안에서 조성달공의 맏아들로 태어나셨는데 천품이 총며하며 정의감이 강하였고 남다른 정열과 기품을 지니고 성장하셨다. 1910년 제국주의 일본에게 나라를 강점당하자 이에 지사님은 비분강개하여 나라잃은 설움을 달랠 길 없어 항일 독립전선에 헌신하기로 맹세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8일 대구 큰장날 이만집 목사 지휘 아래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이 임시정부 특파원 강태동을 통해 보내온 독립운동포고문, 상인폐점권유통고문, 사직권고문을 동지 최익무, 유홍준과 함께 한인관리들과 각 학교 및 상점 등에 보내어 시민들에게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었고, 한편 항일독립운동으로 수감된 많은 애국지사들 가족의 어려운 생활을 도와준 것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피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영어생활을 하는동안 항일사상 더욱 굳어지고 출옥 후에 이범교, 이종선 동지 등을 규합하여 일인고관들의 암살과 경찰서를 비롯하여 관청 등을 폭파하기로 하는 큰 계획을 세워서 폭탄제조에 착수하였다. 화공분야에 특수기술과 제조기능을 가진 지사님은 어렵게 구한 화약으로 자택 은밀한 곳에서 폭탄을 여러 개 만드는데 성공하여 이를 비술산 기슭에 숨겨두고 거사준비와 시기를 정하던 중 왜경에게 탐지되어 다시 동지 권영만, 양한위, 오지수, 김영우, 조선규, 허병율 등 13명이 함께 폭탄음모 암살사건으로 피검되어서 이 큰 계획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왜경의 극심한 고문으로 그 강건하던 지사님은 반신불수가 되면서도 동지들을위해 끝내 단독해위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실형을 받고서 형무소로 이송될 때 걷지 못하는 아들을 본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여 대구경찰서 앞마당에는 대소동이 일어났었다. 출옥 후 지사님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요양을 하시던 중에도 청소년들을 불러모아 항일사상과 독립정신을 심어주다가 끝내 광복 10여일을 앞둔 1945년 8월 2일 향년 62세로 별세하시었다. 묘소는 대구선열공원에 있으며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9년 9월 9일 고령 신성구 삼가 지음 달성 서석종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