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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여 뭉치자.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자. 만주벌에서 외치던 항일 독립투사의 그 목소리가 여기 두류산에 메아리치고 있다. 그 이름 박희광(朴喜光)이다. 1901년 2월 15일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으니 밀양박씨 경주부윤 박수홍(朴守弘)의 11세손이며 윤하(胤夏)의 다섯째 아들이다. 여덟살 때 어버이와 함께 중국 만주땅으로 망명, 낯선 하늘 거친 벌판에서 가난의 아픔과 나라 잃은 설움을 씹으며 자랐다. 1919년 약관 18세의 나이로 분연히 일어서 대한독립군 통의부에 입대하여 여섯해 동안 무장 전투원으로서 혹은 특수 유격대원으로 경격 작전에 참가, 왜적과 맞서 싸우고 군수품을 탈튀하였을 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들을 응징하고 만절 연선에서 폭파를 하는가 하면 심양(봉천)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을 던져 우리의 매운 얼을 떨치었으며 그 후 이등박문의 수양녀인 배정자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1924년 6월 1일 일본 경찰의 악질 밀절 정갑주를 겨레의 이름으로 처단하고 그 달 7일 일진회의 주동자인 민족반역자 최정규를 찾아 권총으로 쏘았다. 침약자의 우두머리들이 드나들던 요정(금정관)을 급습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마련하던 중 적군과 마주쳐 총격전이 벌어져 불행하게도 현장에서 피체되어 관동정 법원에서 1심에 사형, 2심에 무기형을 언도받고 20여년간 옥고의 악독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끝끝내 조직의 비밀을 지켰다. 1943년 출옥하여 광복을 맞았으나 공을 내세우지 않고 초야에 묻혀 어렵게 살다가 1970년 1월 22일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고구려 옛터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피 흘렸고 스무해 모진 옥고 이겨냈지만 말없이 살다가 가시었다. 매운 넋 꿋꿋이 이곳에 서서 언제나 민족혼의 기둥 되리라. 이 자리에 민족 해방과 더불어 환국한 이후 여생을 보내던 달구벌에서 뜻있는 분들과 학생 및 범 시민들의 정성으로 이 곳 두류산 금봉자락에 터를 잡아 동상을 세우다. 1997년 8월 15일 대구광역시장 문희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