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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탑 건립문 눈서리가 땅을 덮어도 송죽은 푸름을 바꾸지 않고 총칼이 목숨을 겨눠도 지사는 뜻을 굽히지 않나니, 자연은 늘 푸른 나무들에 의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인류역사는 불의에 항거하는 지조로 인해 바른 길로 나아감이라. 일제 군국주의 망령이 이 땅을 침탈하고 2천만 백의민족을 노예로 삼음에 4천유여년의 유구한 혈성의 민족자존은 분연히 분기하였더라.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흘리고 차디찬 영어에서 신음했으니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며 평화는 인류공영의 기본권이라. 그 누구도 타의 자유와 평화를 지상커나 늑탈치 못함이 민유의 대도이다. 대구사범학교는 일제치하 1929년 개교 당초부터 반제반일에 앞장섰던 이 고장 선비의 기질을 이어받아 민족의식이 뿌리를 깊이 내렸고 고매한 스승이신 현준혁 선생과 김영기 선생의 감화로 항일운동의 봉화를 올리기 시작했다. 1931년 심상과 1·2·3기생들의 비밀조직 사회과학연구회의 '독서회' 활동이 탄로됨으로써 32명이 체포되어 3명은 징역 2년, 15명은 징역 1년, 여타는 기소유예로 퇴학처분을 당했고, 1934년에는 3·4·5기생들의 독서회 활동이 발각되어 20여명이 처벌되었다. 1938년 일본이 학교 교육에서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자 6기생 18명이 이에 항거하여 우리말 보존을 위한 '민요집'을 발간하여 교재로 사용하다가 왜경에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선후배로 승계된 항일운동은 1939년 여름장학 때 7,8,9기생 전원이 왜관의 경부선 철도 복선 공사에 동원되자 7기생들이 비인도적 강제 노역에 항거하는 사건을 일으켜 18명이 퇴학 또는 정학 처분을 당했고 이를 계기로 9기생 20여명은 비밀결사 백의단을 조직하였다. 당시는 바야흐로 군국주의 일본이 대륙침략에 광분하여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던 때로서 3천리 강토, 2천만 민족을 총칼로 위압하던 공포의 시기였다. 그런데도 오직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지고지순한 젊은 학생들은 열화와 같은 용기로 감연히 일어나 1940년 8·9·10기생 11명이 뜻을 모아 '문예부'를 조직했고, 다음 해에는 8기생 14명이 '연구회'를 조직하였으며, 같은 해 9기생은 백의단을 해산하고 독립의식이 투철한 정예 17명으로 '다혁당'을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워 결속을 다지는 한편, 스스로 실력을 길러둠으로써 일본이 패전하는 날 결연히 일어나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기로 하였다. 더군다나 졸업 후에는 교단에서 학생과 학부형에게 애국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민족운동을 은연중에 지속키로 하였던 것이다. 이는 강요되었던 소위 황국신민의 양성을 거부하기로 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41년 8월 기관지 '반딧불' '학생'이 탄로됨으로써 무려 300여명이 검거되고 그중 박효준, 이태길, 강두안, 박찬응, 이동우, 문홍의 류흥수 박호준 이주호 조강제 김근배 임병찬 안진강 장세파 김영복 이무영 최낙철 윤덕심 윤영석 이원호 오용수 박제민 양명복 권쾌복 배학보 최영백 이종악 서진구 이홍빈 김효식 김성권 이도혁 문덕길 최태식 고인옥 등 35명은 2년여의 예심을 거쳐 대전지방법원에서 1943년 11월 치안유지법, 출판법,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7년에서 2년 6월의 실형이 선고되어 대전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그러나 통한의 사무치는 애석한 일은 강두인 박제민 박찬용 서진구 장세파등 5명이 광복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하였으니 일제의 만행과 망국의 슬픔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대구사범 학생독립운동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어져 다시 10·11기생 비밀독서회원 9명은 위 문예부에 가입하여 선배들의 과업을 계승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끝내는 퇴학처분을 당했으며, 그 후에도 12·13기생 12명의 독서회가 조직되어 활동하는 등 대구사범의 항일민족운동은 8.15광복의 그날까지 면면히 계속되었다. 대구사범 학생 항일독립운동은 1930년 후반부터 40년대 초에 걸친 암울했던 시기에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치안유지법이 난무하던 가혹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일어났고 혹독한 탄 압속에서 줄기차게 투쟁을 전개한 연면성이 그 특징이다. 특히 이 운동은 독립을 쟁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광복 후까지 대비한 미래지향의 지성적 학생운동으로서 항일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새로운 장을 열었던 것이다. 여기 그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을 높이 세우고 그들의 위대한 업적과 이름을 이 비에 깊이 새기노니 불굴의 그 애국 충정 길이길이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할지어다. 1997년 11월 3일 문학박사 오세창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