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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으니 때마침 서기 1919년 봄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민중운동으로 확산되어 나갈때라 고향동지 정운화(鄭雲和) 남께홍(南啓弘) 백선옥(白先玉) 이영호(李英鎬) 신달용(申達用) 이상직(李相直) 오은영(吳殷泳) 정관용(鄭寬龍) 등과 동지를 규합하여 동지 200여명을 이끌고 광혜원시장통으로 떨쳐나왔으니 이때가 서기 1919년 4월 2일이라 그 이튿날 4월 3일 광혜원 장날을 기하여 수천명 민중이 운집한 자리에서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강도질해 간다」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뒤따르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천번 만번 외치시니 그 뒤를 따르는 인파가 2천여명이요 기세도 당당하게 시장 거리를 시위하시니 그 뜻과 그 기운이 마치 하늘을 찌르는듯 하였다. 시위군중은 장터에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바돌말에 있는 헌병주재소를 때려부수고 항거하며 투쟁할새 직천헌병대에서 수십명의 무장헌병들이 나와 무차별 총격을 가함에 이에 맞서 싸우다 쓸어진 군중이 부지기수요 그중 이치원(李致遠) 김경윤(金警允) 윤광옥(尹光玉) 김득손(金得孫) 김례원(金禮遠) 구씨(具氏) 류치선(柳致先) 모자 등도 이때에 적탄에 맞고 타계하셨다. 이때에 자기 아들이 적탄에 맞고 쓸어지는 것을 목격한 류치선 부인은 「이 도둑놈들아 나도 같이 죽게 쏴라」라고 소리치며 달려들자 그 잔악무도한 왜병은 그 힘없는 부인마져 자기 아들 시체위에 피를 토하고 쓸어져 죽게하니! 장하도다 한국의 민중이여! 한국의 어머니여! 이 고장의 선각자 윤병한 선생이시어! 그후 선생께서는 왜병에 체포되어 악날한 고문과 폭행을 당하시며 3년여의 옥고를 치르셨고 동지 정운화 백선옥 남계홍 이영호 신달용 등은 각각 8개월씩 영오의 몸이되어 고생하고 나오셨다. 선생께서는 그후 초야에 묻혀 지내시면서 이전부터 연계되어온 상해임시정부와 다시 내통하며 독립투사 김좌진 신팔균 등과 연락하여 군자금 조달에 온 심혈을 기울여오시다가 아깝게도 1933년 9월 5일 향년 59세를 일기로 한많은 일생을 마치시니 오호 한재로고! 선생의 위엄은 정부에서도 인정하여 1980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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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서 현장에서 순절하신 '류치선(柳致先) 모자'는 '박치선(朴致先, 박도철) 모자'로 밝혀졌다. 하지만 아직 서훈이 않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