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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근은 충청북도 음성(陰成) 사람이다. 1926년 9월에 개성상업학교(開城商業學校)에 재학하던 중 일본인 교장이 학교 운영과 교육을 일본인 위주로 하는 것에 저항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한 뒤, 1927년에 친형(親兄)인 장현팔(張鉉八)이 거주하는 전라북도 정읍(井邑)에 가서 토리교회(土里敎會)의 주일학교(主日學校) 교사를 하면서 항일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29년 9월에는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대련(大連)을 거쳐서 1931년 11월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상해 교민단의 서기, 의경대(義警隊) 간사, 한인청년당 이사 겸 서무부장 등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4월에는 한인청년당 기관지 성종(醒鍾)에 "親倭派는 速時에 反省하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재하여 일제 앞잡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사의 의거 뒤에 일경의 발악적인 검거 선풍으로 상해(上海) 불조계(佛租界)에서 안창호(安昌浩) 김덕근(金德根) 등과 함께 체포되어 6월 7일에 국내로 호송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경찰의 고문을 받는 등 옥고를 겪다가 1932년 7월에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37년 이후에는 상해,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민족사상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신정숙은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광복군에 입대하여 1941년 3월 1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제3분처 징모위원 임명식을 갖고 신정숙은 제3분처위원 겸 회계조장으로 파견되어 활약하였으며, 1942년 10월에는 광복군 제2지대 3구대 3분대에 편성되었다. 그후 제3분처는 본부를 연산현 하구진(鉛山縣河口鎭)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신정숙은 김문호(金文鎬)와 함께 전선과 후방에서 중국 유격대와 합동 공작으로 정보, 선전공작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또 포로심문을 통하여 적의 일선 및 후방에 관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공작에 활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