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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에 나서 제 한 몸 위해 살기는 쉬우나 겨례와 나라 위해 자기 일생을 희생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지난날 독립운동자들은 그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그러기 위해 온갓 고초를 또 능히 이겨내였든 것인바 혜춘 경석조 선생은 바로 그 독립운동자들 중의 한 분이시라. 나는 여기에 즐거이 그 분의 행적을 초한다. 그의 본관은 청주요 고려시대 명문 출신인 경진의 26대손으로 서기 1881년 소백산 정기 서린 이 고장 연풍면 유하리 앞맑게 흐르는 쌍천 언덕 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30세에 나라가 망하고 39세에 만세운동이 일어나 이에 가담하였다가 탄로나 체포되어 일제의 옥중에서 고초를 당하고 나와 만주로 망명하여 정의부와 신민부 등 구국혁명단체에서 활약했고 젊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국내로 들여보내 무력항쟁을 시도하므로 일제의 간담을 놀라게 하는 등 항일활동에 시종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밤낮 염원하던 조국 광복을 맞이하여는 한국혁명군사단을 조직하여 거느리고 고국으로 돌아와 광복군 국내지대로서 국군창설에 크게 이바지 하였으며 정부수립과 동시에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일하다가 사임한 뒤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가 살다가 원한의 6.25동란을 만난 뒤는 이곳 저곳으로 표랑해 다니며 오직 조국통일만을 위하여 애쓰시다가 서기 1957년 4월 7일 청주에서 영민하시니 향년 77세시였다. 그의 몸은 비록 가시었으나 그 높은 뜻과 이름은 모든 독립운동자들과 함께 우리 역사 위에 길이 사실 것이다. 유족으로는 3남을 둔 아들 성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