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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공장을 인수하시는등 독립운동자금 기반구축에 동분서주 3년여를 전력하시었다. 선생은 평소 시작을 즐기신바 이때 지으신 시 한수에 왈 ..... 이라 하셨으니 당시의 선생의 석잡하신 심정을 헤아릴수 있다. 1915년 월남에서는 안중근의사전을 배포하다가 왜경에 피체되어 고문을 당하신 일이 있고 1917년 11월에는 국내연락차 일시 귀국하였다가 익년 5월에 다시 출국하시어 봉천으로 가셨다. 이때 청태조릉에 오르시어 시한수를 지으셨는데 왈 .......라고 선생의 괴로우신 심경을 표현하셨다. 이곳에서는 ?남 ?주연동지와 농장에도 손을 대셨고 동년 12월에는 미국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예관 신규식선생으로 부터 서북간도 소령 교포에 연락하라는 기밀서류를 받으시고 즉시 길림으로 가시어 여시당 박남파 이동녕 조소앙 김좌진선생등과 회합하여 상해를 중심으로하여 파리에 사절을 파견할것과 국내와 미주를 연락할것등을 토의하고 농장경영차 내도한 김하수를 설득하여 군자금조로 일만금을 얻어내는 한편 길림동지 수십인을 규합하여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시고 여시당을 총재로 김좌진은 군무부장에 선생은 서무부장에 취임하시었고 1918년 3월에는 미주 상해 북경 소령 국경및 본국에 독립선언문 이천매를 석판인쇄해서 밀송하시고 파리평화회의에는 장문80자를 전문으로 타전하셨다. 동년 5월에 신채호선생과 대한주보발간계획을 세우셨고 상해임시정부수립과 더부러 의정원 초대의원에 피선되어었고 이시영 신규식 신채호선생등과 토의하여 기밀사절로 서울에 잠입하시어 활약중 왜경에 피체되어 총감부에 수감되시어 옥고를 치루셨으니 경기철창에 처절하신 영어생활은 나라없는 민족의 설음이 아니고 무었인가. 1925년에야 병보석으로 출감하시어 고향에 돌아와 금족령하에 ??하시면서 광복의 날만을 고대하시며 후진양성등에 진력하시다가 마침내 8.15를 맞아하셨고 해방후는 바로 상경하시어 임정환영위원회 고문을 맡으시고 정부수립과 더부러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초대 감찰위원장직을 제수받으셨으나 이를 사양하시고 위당 정인보선생을 추천하시었다. 1961년에는 광복회원이 되시었고 그후 수년간 대종교 본사 총전교를 역임하시다가 1971년 11월 18일에 서울 흑석동 우사에서 졸하시니 향년은 81세이시고 지장리 선영하에 장하였다. 기후 1963년 3월 정부로부터 독립유공표창장이 수여되었고 1073년 8월 20일부터 11월 7일까지 2개우러간 선생의 해외체임중의 기록이 담긴 지산외유일지가 서울신문에 연재되었으며 1975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제8집에 지산일지가 수록되었고 1977년에는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와같이 선생은 구국운동으로 시종하시었으니 수방풍토에 노숙충찬의 정이 과연 어떠하였으며 다년간의 옥고와 누차에 걸친 왜적의 혹독한 형장지하에도 지사불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