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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일제가 동포들로부터 불법징수한 세금의 탈환과 애국동지의 성금을 모아 만주로 보내 독립의병및 무기구입용 자금으로 쓰게하는 동시에 전국적으로 일인고관과 악질부일분자를 엄단하는 임무를 띄고 적극적인 활동을 도모하였으나 왜경의 심한 감시로 어려움을 많이 당하셨다.그후 1916년에는 정의사께서 광복단 밀령을 내리시기를 "강토는 빼앗기고 왕업은 전복되고 생령은 도탄에 헤매이니 그 고통을 참아 보기어렵도다. 때마침 천재는 왜도 동경을 엄습했으니 어찌 이 기회를 놓칠것인가 이에 오인은 엄연히 일어서 국난회복을 기도코저하니 동포는 각기 그 능력있는대로 능문자는 문으로 능무자는 무로서 또 능용자는 용으로 능술자는 술로서 이를 도웁고 특히 유재자는 재로서 돕지않으면 아니된다"는 요지의 엄령을 각처의 부호들에게 시달하여 의연금을 요구하셨는데 칠곡의 악질부호는 오히려 이같은 광복단의 지령을 비방하고 일관헌에게 밀고하므로 선생은 채유, 강의사등과 더부러 그를 살해하고 "왈 유광복은 천인시부라 성비대죄하여 계아동포하노라"는 경고문을 광복단명으로 도처에 부탁하고 피신중 1918년 5월 18일 괴산군 칠성면 정운채씨 가에서 몽둥이라는 별명의 권모한인형사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재판을 받던중 사형을 각오한 채기중의 단독희생적 단죄활동과 선생의 백부의 친구이던 민병석씨(전 대법원장 민복기씨의 선대인)의 도움으로 의외로 단기인 1년 5개월의 복역을 치르고 나오시기도 하였고, 또 1925년 봄에는 친일 거두가 사가에 들리기 위해 괴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정의사는 칠곡의 손기찬 풍천의 조용필 정진화에게 연락하여 살해모의를 하려다가 왜경에 연행되어 7일간의 구류를 당하시기도 했다. 정의사는 이와같이 오직 광복 일념으로 국내에서 동지를 규합하시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시다가 왜경의 요시찰인으로 낙인이 찍혀 툭하면 오라가라하여 심한 고문와 옥고를 치르신적이 헤아릴수없이 많았다. 이처럼 열혈적으로 광복운동에 종사하신 정의사께서 말년에 이르러 고문받은 상처가 도지면서 건강을 상살하시더니 드디어 1948년 3월에 71세를 일기로 한많으신 생애를 마치셨다. 정의사는 순흥안씨 규호공의 녀를 취하여 슬하에 아들4형제를 두셨는데 장남은 부친의 뼈를 깍는 고초를 연상하고 상심하다가 50세도 못되어 요절하였고 차삼사남과 후손들은 괴산 청수와 서울에 현주한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면서 조국광복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우신 정의사의 위국투쟁의 혁혁하신 훈적을 광복후에도 유족들은 숨기고 발설하지 않으므로 오랫동안 알려지지않고 내려오는데 충청일보의 보도로 비로소 세상에서 알게되었고 정부로부터는 1980년 8월 15일의 광복절을 기하여 건국공로포장이 그의 장손 정태익씨에게 수여되었다. 이와같은 일련의 보도를 통하여 뒤늦게서야 알게된 우리 괴산군민 일동은 정의사의 높으신 애국정신과 생사를 초월하신 광복투쟁에 대하여 ㄱ다같이 경복감탄하여 마지않고 있는터에 정의사가 원래 한학자로서 독실하신 유림의 한분이었던 연고로하여 현 괴산군내 전체유림이 건비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괴산향교 전교인 윤승로씨를 대표로 뽑는한편 소상한 취지문을 첨부하여 불초에게 비문작성을 청하시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