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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곳에는 아전들의 탐학이 심했을뿐만아니라 백성들이 의병봉기와 관련하여 무고하게 잡혀죽는 일이 허다했는데 의병을 진압하려온 수배대장들을 설득하여 함부로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했으며 황무지개척과 수리사업에 힘쓰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그에 감동한 고을사람들이 38개 방마다 그뜻을 기리는 선정비를 세운바있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신 선생은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되어 칙서가 반포되고 경술국치를 막제되자 나라가 망함을 한탄하며 가족과 친지들에게 유서를 남기시었다. 또한 칙서에 대해서는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하고 적에게 굴복함은 본래의 뜻이 아니니 차라리 돌아가신 시종무관장 민영환과 지하에서 함께 지내길 원할지언정 난신적자와 더불어 이세상에 같이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상소를 지어 황관내시에게 전하여 올리게하였다. 그리고 객사에 가서 배례한후 "사직은 안보하지 못하고 오늘에 으리렀사오니 불충한 신 홍범식은 죽음으로써 사죄합니다."라 하고 즉시 목을 매어 자결코자 하였으나, 뜻밖에 사령에게 발견되어 뜻대로 결행하지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선생은 다시 힘써 평범한 태도로 사령이 안심하도록 담소하다가 홀연히 객사 후원인 조종산에 올라 사시사철 변함없이 홀로 청정한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장렬히 순절하시었으니 향년 40세이셨다. 장례행렬이 금산을 떠나 선영으로 향할때 군민들은 도로에 나와 호곡을 하였고 괴산까지 수백명이 따라와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선생은 괴산읍 제월리 선영에 봉안되어 고히 잠들고 계시며 정부에서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하였다. 무릇 사람들은 모두 각각 충의의 천성을 가졌다지만 그처지